담임선생은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줄 세우기를 했다. 교탁을 중심으로 호명된 아이들이 순서대로 나왔다. 앞줄에 선 아이들은 거만한 미소를 흘렸고 뒷줄로 갈수록 아이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성적 순에 따른 줄서기였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담임선생이 종례를 끝마치고 나가는 동시에 뒷줄 아이들이 앞 줄 아이들에게 몰려들었다. 온갖 아양을 떨었다. 귀갓길엔 군것질을 제공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앞줄에 선 아이들에게 혜택은 또 있었다. 담임은 앞줄 아이들에게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관심도 집중됐다. 연극의 주인공은 앞줄 아이들 차지였다. 고백하자면 기말고사를 보기 전까지 기자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86년의 일이었다.
지난 15일 3대 국제신용평가 기관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발표한 신용등급 상향 조정은 그런 느낌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환호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신용등급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공교롭게 영원한 숙적인 일본은 다음날 한국의 AA-보다 낮은 A+로 등급이 내려갔다.
한국은 우등생인 일본을 제치고 앞줄에 선 것 같았다. 한국을 바라보는 주변국들의 시선도 달라진 것 같았다. 한국석유공사도 덕을 봤다. S&P가 등급을 올리면서 우량등급 투자 수요를 확보해 10년 만기 글로벌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S&P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 환경, 견조한 재정상황, 우수한 대외건전성 등 칭찬을 늘어놨다.
S&P의 발표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30여 년 전 초등학교 5학년 때가 묘하게 오버랩됐다.
줄 세우기를 하던 담임과 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사는 절대 갑(甲)이었다. 줄 세우기에서 앞줄에 서면 좋았다. 다만 절대 갑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달랐다. 그때 담임이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 있다면 아마도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했다며 사회적 지탄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신용평가사는 당당했다.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은 철저한 을이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신용등급을 올리면 그에 따르는 경제 효과는 놀랍다. 이번에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했다”면서 S&P와 관련해 부정적 기사가 나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S&P의 평가 방식에 불편함을 제기하지도 않았다. S&P는 또다른 신용평가사들처럼 자체적인 계산 방식으로 경제 지표를 매기고 있다. 2008년 모기지론 사태 때 제대로 신용평가를 하지 못한 뒤 보수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평가 방식은 함구하고 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는 식이다.
이처럼 S&P와 피치, 무디스가 세계 신용평가를 독점하다 시피하자 G2인 미국과 중국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건존스레이팅, 다궁글로벌 등 신용평가회사를 만들었다. 여기에 러시아 루스레이팅까지 함께 참여해 ‘유니버설 크레디트 레이팅 그룹(UCRG)’을 설립했다. 홍콩에 본사를 두고 2020년까지 새로운 글로벌 신용평가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한 기재부 관계자는 “결국 그 나라의 경제력이 좌우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중국과 미국처럼 강대국이 아닌 이상 을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갑을 이기는 을이 되려면 자기 경쟁력을 키우는 방법뿐이라는 얘기다. 30여년 전 담임의 대우가 달라진 것도 3개월 뒤 앞줄에 선 뒤부터였다.
서윤경 경제부 차장 y27k@kmib.co.kr
[세상만사-서윤경] 신용평가사 甲, 대한민국 乙
입력 2015-09-25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