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그림산책] 작은 존재라도 근원에 이어져 있다

입력 2015-09-26 00:23
김진관 ‘콩’ 54×44cm, 한지에 채색, 2010
예술가의 여러 역할 중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하나는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한 것을 자기 방식대로 표현하는 창조적 역량과 작업이다.

김진관은 씨앗이나 강낭콩 열매, 벌, 마른 풀과 같이 별로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 것에 대해 무한한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 그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가르치고, 동양화를 그린다. 동양화라 하면 대개 산수화를 생각하게 된다. 그것도 장중하고 격 높은 산과 바위, 강과 호수, 떠나가는 배 등을 떠올린다. 화훼 초충 장르에서도 화려한 모란이나 매화, 난초, 대나무를 주로 그려왔다.

그러나 김진관은 작은 것들, 그것도 아주 넓은 화면에 작은 것들을 집합시킴으로써 역행 대비적 효과를 노린다고나 할까.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그의 그림을 보고 “허전한 그의 화폭과 마주하는 순간은 고요와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했다. 김진관의 이런 발견은 10년이나 아내의 병간호를 직심으로 했던 그 고통 중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아내의 병간호와 더불어 자연의 작은 열매나 하찮은 풀 한포기라도 그 외형 이전에 존재하는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게 되었다. 세계는 철저한 유기체적 구조를 갖고 있다. 본인은 현대의 소모되고 잃어져가는 근본의 작은 존귀함에 초점을 두었다.’ 김진관이 작가생각에 이렇게 썼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그 근원은 같은데서 연유한다.

모든 부분은 전체 통합에 이끌린다. 그의 작품 ‘콩’은 이런 작가의 생각을 뚜렷이 드러낸다. 비록 작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확실하고 그것이 썩음으로 담당하는 역할 또한 분명하다(요 12:24). 그 작은 것에 우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조선 후기에도 사물에 대한 거시적 접근과 미시적 접근이 있었던 것 같다. 선비들은 개천가 지천에 깔려있는 ‘여귀’ 같은 잡초에서조차 생태계의 균형을 찾으려 했었다. 홍대용(1731∼1783)은 자연을 볼 때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인간의 입장에서 물(物)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고 했다.

기실 인간이 자연을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의 생명을 지켜주고 있음을 상기해야겠다. 산소를 공급해주는 나무가 없으면, 꽃가루를 옮겨주는 벌들이 사라지면, 생명을 태생기키는 씨앗이 없으면, 인간 존재의 끝은 분명하다.

인간의 지나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이 부여한 질서와 균형이 깨뜨려지고 있음을 응시할 일이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어김없이 담겨져 있다. 무엇하나 소홀히 할 것은 하나도 없다. 빛과 어둠, 큰 열매와 작은 씨앗, 싱싱함과 썩어짐, 향기와 악취, 심지어 욕구조차도 우주의 조화를 위해 필요 불가피하기에 존재한다. 다만 그것이 갖는 오묘한 균형을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보고 파괴하기에 여념이 없을 따름이다.

작가는 이 ‘콩’이라는 작품에서 내면에 대한 응시와 절제를 요구한다. 사유의 시간을 게임과 영상과 문자 메시지 등에 모두 빼앗기고 황폐해져가는 인간의 내면에 대해 경고한다. 조용히 들여다보면, 깊은 사유의 침묵 속에 침잠해보면 작은 것 하나에도 엄청난 신비와 섭리가 담겨있음이 눈에 보인다. 이를 하나하나 발견해가는 일이 곧 믿음의 길이기도 하다.

이석우 (겸재정선미술관 관장·경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