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부터 한 주간 동안 거의 같은 기간에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100회 총회를 가졌습니다. 장로교 첫 번째 총회가 1912년 평양에서 열렸기 때문에 마땅히 올해 103번째 총회가 되어야 합니다만, 1943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교단이 폐쇄되고 일본기독교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올해 100회 총회를 맞게 된 것입니다. 세 번의 잃어버린 총회를, 치욕의 과거를 우리는 장로교회의 역사 속에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교단마다 서로 다른 총회 주제를 정하고 100회 총회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였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의제나 결의는 없었습니다. 수백 명의 총대들이 며칠 동안 모여서 총회를 한다면 엄청난 경비가 들 텐데 과연 그만한 경비를 써가면서까지 모여 내놓은 결과가 얼마나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고, 한국사회에 감동을 주었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아니 지난 100번의 총회 가운데 과연 몇 회 총회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감동을 준 총회로 기억되는지 꼽아볼 일입니다.
‘기억(記憶)’은 ‘기념(紀念)’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현하지만, 그 속에 ‘기억’이라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 제의와 축제에 불과할 것입니다. 한국장로교회 100회 총회가 끝난 후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장로교 총회가 지난 99번의 총회를 기념하고 자축하는 자기들만의 잔치로 끝난 것이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100년 후, 단 하나만이라도 우리 신앙의 후손들에게 기억될 의제를 결의하고 실천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00회 총회 주제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로 정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저녁식사가 거룩한 것은 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제자들이 전승해야 할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성만찬적 삶’입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참여적 행동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행동이 기억에 앞섭니다. 기억하니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곧 기억입니다. 행동 없는 기억은 망상이 될 수 있고, 기억 없는 행동은 망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삶을 뒤따르면서 그분이 자신을 바치셨던 죄인들과 하나님 백성의 고통, 고난에 동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증언과 선교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감사의 결과입니다.
프랑스어에서 ‘거룩함(sacred)’이라는 단어는 ‘희생(sacrifice)’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거룩함은 희생과 관계되어 있고, 거룩한 만찬의 근본정신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적 삶’이란 자기희생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삶입니다.
자신은 조금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거나 세상 탓만 하는 사람은 거짓 진보주의자,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이른바 ‘성총회’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구별(거룩하게)되는 때는 오직 자신을 희생할 때입니다. 한국장로교 100회 총회가 기념비적 사건이 되기를 기대한 ‘혹시’가 ‘역시’로 끝난 것이 아쉽습니다.
채수일 한신대 총장
[바이블시론-채수일] 장로교회 100회 총회를 마치고
입력 2015-09-25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