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람(33)씨는 올해로 11년째 국제 구호개발 기구 월드비전에서 국내외 어린이 8명을 후원하고 있다. 후원 아동에게 ‘한국 엄마’ ‘누나’ ‘언니’로 불리는 정씨는 매년 이들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챙긴다. 특별히 국내 후원 아동의 경우엔 추석과 설날, 어린이날에도 선물을 보낸다. 틈틈이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적은 편지를 보내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도 잊지 않는다.
지난 4월엔 동갑내기 남편 김영범(영어강사)씨와 ‘나눔 결혼식’을 올려 축의금 전부를 아프리카 우물파기 기금으로 내놓았다.
추석을 앞둔 지난 22일 오후 경남 김해의 자택에서 정씨와 그의 남편을 만났다. ‘새댁’ 정씨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앳돼 보였고 목소리는 가늘고 높았다.
“남들이 선호하는 명품가방이나 고급 화장품, 옷에 크게 관심이 없어요. 만날 똑같은 옷 입고 가방을 들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해요. 다른 사람만 챙기지 말고 너부터 챙기라고요.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해요. ‘고급 화장품 안 발라도 동안이라 괜찮다’고요(웃음).”
대를 이은 나눔
정씨의 부모는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3년간 경북 포항에서 독거노인 무료급식소를 운영했다. 안수집사인 정씨의 아버지 정영생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포항 실내수영장 근처에 무료급식소를 열고 지역의 독거노인들에게 매일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음식 준비는 어머니 이순호씨와 같은 교회를 다니던 집사·권사들이 맡았고, 정씨는 방학 때마다 장을 보거나 식판, 식탁을 정리하는 식으로 힘을 보탰다. 당시 독거노인 60∼70명이 매일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평소 부모님께서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꼭 돕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셨어요. 저는 주로 방학 때 무료급식소에 나가 봉사했는데 한 어르신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급식소가 없으면 하루 종일 굶어야 한다’고요. 감사 인사였지만 저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직도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다는 걸 그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부모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나눔의 필요성을 체득한 정씨는 대학 진학 후 나눔활동을 본격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입학 후부터 아르바이트로 번 용돈을 쪼개 후원금과 후원예비금을 모았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후원금을 보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70만원을 예비금으로 마련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면 나눔을 시작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는데 갑자기 후원을 중단하게 될까봐 선뜻 시작하지 못했어요. 책임감 없이 함부로 했다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되니까요. 어느 정도 돈을 모은 2004년부터 몽골 아동 후원을 시작했는데 해 보니 더 욕심이 생겼어요. 제가 쓸 것 아껴서 더 많은 아이들을 돕고 싶더라고요. 그런 마음으로 한두 명씩 늘리다 보니 후원 아동이 지금에 이른 겁니다.”
그런 정씨가 결혼식을 축의금을 모두 기부하는 ‘나눔 결혼식’으로 마련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남편과 양가에 동의를 구하고 청첩장 앞면에 ‘축의금은 빈곤지역 식수사업 후원금으로 쓰인다’는 문구를 넣었다. 식장 입구에는 월드비전 후원 10주년 기념 증서를 걸었다.
“양가 부모님도 모두 그리스도인이시고 이웃돕기에 관심 많은 가슴 따뜻한 분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객들도 대체로 ‘기특하다’는 반응이 많았고요. 우리 부부뿐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결혼식을 할 수 있어서 참 뿌듯했습니다.” 부부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기부는 ‘하늘나라에 붓는 적금’
정씨의 후원 아동은 현재 국내 아동 3명과 케냐 방글라데시 우간다 라오스 아동 5명이다. 후원 아동 대부분이 저소득 가정이거나 다문화가정, 조손가정 자녀다. 정씨의 매달 정기 후원비는 30만원. 여기에 매달 1만원씩 보내는 긴급구호자금을 더하면 모두 31만원을 나눔활동에 쓰는 셈이다. 스포츠 용품을 판매했던 정씨는 1년 전 회사도 그만둔 터라 현재 고정 수익은 거의 없다. 후원 비용에 부담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으니 오히려 “후원을 더 늘려야 할지 고민 중”이란 답이 돌아왔다.
“저는 기부를 ‘하늘에 쌓는 정기적금’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직장 다닐 때부터 ‘어차피 나갈 돈’이라 생각하고 따로 돈을 모았어요. 지금도 그 자금에서 쓰는 겁니다. 은행에 넣는 돈은 원금의 1∼2% 이자가 붙지만 하늘에 붓는 돈은 이와 비할 수 없는 천국에 가치를 쌓는 일이라 믿거든요. 비록 제 눈에는 보이는 건 없지만요.”
정씨가 11년간 후원하며 체험한 크고 작은 기적들도 나눔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제가 살면서 누린 복을 헤아려보면 후원금의 몇 배로 갚아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무엇보다 중환자실에 한 달 동안 입원했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아버지의 경험이 가장 큰 경험이었어요. 의사들도 모두 마음을 정리하라 했거든요. 그렇게 사경을 헤맸던 분이 지금은 깨어나 정정하세요. 그때 아버지께서 ‘다 착한 일을 한 네 덕분이야’란 말씀을 하시던 게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평생의 ‘키다리 아저씨’, 하나님께 의지
정씨가 11년간 국내 후원 아동에게 보낸 명절 선물은 학용품, 장난감, 책, 과일, 수제돈가스 등 다양하다. 후원 아동의 필요에 따라 선물하긴 하지만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따로 묻지는 않는다. 편지를 주고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문화가정 자녀가 한국어가 서툴러 힘들다고 편지에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해 명절에 동화책이나 캐릭터 학용품 등을 선물해주는 식이다. 특히 명절에는 어르신들과 같이 먹거나 즐길 수 있는 고기, 떡, 화과자 등을 보낸다. 자신이 보낸 선물을 계기로 각기 떨어져 사는 후원 아동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정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 추석 선물로는 한우와 돼지고기가 함께 담긴 선물세트와 손세정제를 준비해 보냈다. 쇠고기와 돼지고기가 같이 있는 상품이 추석 음식 장만에도 좋고, 손세정제로 질병 감염 걱정도 덜 수 있다는 이유다.
“명절엔 가정이 화목해야 아이들도 행복해요. 명절날 어른들이 싸우면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겠어요. 지난해 설부터는 어른·아이가 한자리에서 오순도순 먹을 수 있는 한우세트를 보내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한 아이는 편지에 ‘집 나간 입맛을 돌아오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적어 기억에 남아요. ‘손주 덕에 잘 먹었다’는 칭찬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친구도 있고요. 이번 선물은 아이들에게 어떨지 기대됩니다.”
편지에 스치듯 적었던 바람을 세세히 기억하고 챙기니 그를 ‘키다리 아저씨’로 믿거나 ‘고민 해결사’로 믿는 후원 아동도 있다. 정씨는 ‘자전거를 갖고 싶다’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등 구체적인 목록을 편지에 적는 아이들에게 ‘엄마 말씀 잘 들으면 생긴다’고 완곡하게 설명하지만 선물금을 보내는 등 곧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그의 편지나 선물금이 후원 아동의 삶과 가정을 바꾸는 경우를 적잖이 봐서다.
“제가 보낸 전자피아노에 후원 아동 어머니가 힘을 얻어 모자원에서 자립한 한부모가정도 있고, 생일 선물금으로 부서진 지붕을 수리해 큰 비를 피한 경우도 있어요. 편지도 큰 영향을 미쳐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아 방황하던 후원 아동이 1년 넘게 편지를 보내자 마음을 다잡기도 했어요. 얼마 전엔 늦둥이 동생 이름을 제 이름으로 지은 아이도 있었어요. 나누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후원 아동 어머니가 제 이름을 따 지으셨대요. 내색은 안 했지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정씨가 아이들이 느끼는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는 편지에 복음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한다.
“후원 아동과 편지하며 가장 많이 느끼는 건 부모의 부재 등으로 인한 ‘근본적인 외로움’입니다. 하지만 이를 제가 채워줄 순 없어요. 그래서 편지에 ‘너를 항상 주님께서 사랑하시며 함께하신다’는 내용을 티 안 나게 전합니다. 후원 아동이 교회를 안 다니거나 타종교인 경우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요. 그저 너의 ‘키다리 아저씨’는 하나님이고, 그분만이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알려주는 거죠.”
11년간 정씨의 도움을 받은 국내외 후원 아동은 8명이 넘지만 그는 단 한번도 직접 만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해 후원이 종료된 한 여자아이가 정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그가 고사했다. 정성들여 돌보는 후원 아동을 만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다.
“제가 바라는 건 ‘힘들고 어렵게 자란 아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뿐이에요. 제 이름과 존재는 잊혀져도 상관없어요. 아이가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나도 그 사랑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김해=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월드비전 후원문의 (02-2078-7000)
어린이 8명 후원하는 ‘한국 엄마’ 정보람씨 “저 명품가방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행복 적립하거든요”
입력 2015-09-26 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