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죽어. 빨리 와서 해결해줘.” 경기도 고양경찰서 지모(38) 경장의 어머니 최모(77)씨는 지난 8일 오전 10시쯤 이상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낯선 남성은 “아들이 사고로 크게 다쳐 죽어가고 있다”며 “돈을 가져와야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신음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최씨에게 이 목소리는 아들의 것으로 들렸다.
전화한 남성은 최씨에게 은행에 가서 돈을 찾은 뒤 은행 앞 도로를 건너오라고 했다. 어떤 옷을 입고 은행에 가는지 물었고,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말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최씨는 바로 집 근처 기업은행으로 향했다. 창구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서성이며 초조해했다.
최씨는 은행 창구에서 통장에 들어 있는 1200만원 전부를 찾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당황한 탓에 비밀번호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자신의 통장이었고 신분증도 있었기에 비밀번호를 초기화해 출금해줄 수도 있었는데, 초조한 표정의 할머니가 현금 1200만원을 찾으려는 걸 이상하게 여긴 기업은행 송모(26·여) 계장은 최씨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비밀번호를 아는 가족이 있느냐고 묻자 아들이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최씨는 “아들에게 전화하면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보이스피싱이라고 확신한 송 계장은 은행 유선전화로 아들에게 전화해보자고 최씨를 설득했다.
“여보세요.” 아들인 지 경장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당황한 최씨는 “괜찮으냐”고 수차례 되물었다. 보이스피싱임을 알아차린 지 경장은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부르며 황급히 은행에 뛰어 들어왔다. 아들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인 최씨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몇 분 동안에도 “너무 심장이 뛴다”며 떨고 있었다.
지 경장은 “평소 어머니께 보이스피싱에 대해 많이 말씀드렸는데도 많이 놀라서 속은 것 같다”고 말했다. 평소 보이스피싱 예방교육을 잘 받았던 현직 경찰관의 노모조차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한 것이다.
보이스피싱에 대한 경각심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범죄는 줄지 않고 있다. 2013년부터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최근 3년간 피해액만 3000억원에 달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임수경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보이스피싱 범죄 발생 현황 및 적발 내역’을 보면 2012년부터 지난 7월까지 2만3500건이 발생했고 피해액은 2905억원이다. 같은 기간 보이스피싱 범죄로 검거된 사람은 2만9026명이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기승을 부리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경찰은 “추석에 택배를 보내겠다며 주소나 휴대전화 번호 등 개인정보를 묻고 이를 활용하는 보이스피싱 범죄가 급증한다”면서 “모르는 사람의 전화나 문자메시지 등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
[기획] 예방 교육 받은 경찰 모친도 보이스피싱에 깜박 속았다
입력 2015-09-22 0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