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동화 읽어주는 20년 경력 배우 “이렇게라도”… 연극계 눈물겨운 생존 현장

입력 2015-09-22 02:39

대학로에서 20년간 아동극을 하며 ‘연극밥’을 먹어온 김모(46·여)씨는 요즘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어린이집으로 출근한다. 하루 8만원을 받고 석 달 동안 일하기로 했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김씨는 다섯 살 아이 5명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주인공인 물고기가 길을 잃는 대목에서 김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고기가 다시 친구들과 만날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마치 연극하듯 읽어 내려가자 아이들은 하나둘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린이집 교사 김자희(33·여)씨는 “아이들이 이렇게 책읽기에 집중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고 했다.

김씨가 하는 일은 1시간30분씩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함께 연극놀이를 하는 ‘어린이집 알바’다. 정식 명칭은 종로구의 ‘찾아가는 이동극장’. ‘연극 예술’의 구심점인 대학로와 명동이 시름시름 앓자 종로구는 서울시 예산 3억원을 받아 이 사업을 시작했다. 관내 어린이집 11곳에 연극인을 파견하고 있다. 당초 40명을 선발하려 했는데 모집 사흘 만에 43명이 몰렸다. 김씨는 “아들이 대학생인데 학비 대기가 빠듯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며 “이렇게라도 해야지 어쩌겠느냐”고 했다.

연극계는 ‘빈사 상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올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가 터지면서 공황이 왔다. 연극계는 배우들 생활고는 물론 ‘연극의 멸종’까지 우려한다.

단원 10명으로 꾸려가고 있는 대학로 A극단 관계자는 “재작년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극명히 드러난다”고 했다. 2013년 5∼6월 이 극단은 한 달에 약 4000만원을 벌었다. 그러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로 관객이 급감하면서 월 매출은 1000만원으로 추락했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 나아지나 싶었지만 1년 만에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이 극단이 지난 6월 올린 매출은 1000만원이 안 된다. 극장 대관비와 각종 비용을 빼고 나면 단원들에게 월급 줄 돈이 없다.

단원들은 오전 8시부터 4시간가량 연습이 끝나면 각자 ‘일터’로 떠난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모(27)씨는 “예술인은 원래 배고프다지만 메르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공연예술계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시작한 ‘1+1 티켓 사업’은 중소규모 극단이나 지방 극단에는 ‘그림의 떡’이다. ‘1+1 티켓 사업’은 지정 예매처에서 공연티켓 2장을 사면 이 가운데 한 장은 국고로 지원해주는 사업이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의원실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체 지원액의 25%가 대형 라이선스뮤지컬에 쏠렸다. 지난달 18∼25일 티켓 판매량을 추산한 결과 ‘엘리자벳’에 4470만원, ‘맨 오브 라만차’에 3848만원이 지원됐다. 이런데도 정부는 최근 지원대상 관람료 상한선을 5만원에서 7만원으로 올렸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예술인복지법’도 제 역할을 못한다. 한 중소극단 관계자는 “구비 서류가 많고 복잡해 신청조차 어렵다. 정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