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5) 선교 정책과 갈등

입력 2015-09-22 00:02
1886년 당시 제동의 제중원 단면도. W 대기실, I 일반 병동, S 의학교로 구분했다. 흔히 알려진 제중원 사진은 대기실 부분이다(왼쪽). 1886년 11월 23일 내려진 교지로 미국 의사 헤론을 가선대부자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옥성득 교수 제공

1885년 6월 말부터 서울 북장로회 선교회에 알렌 의사, 언더우드 목사, 헤론 의사가 함께 활동하면서 경험이 부족한 20대 청년들이라 선교 정책, 정체성 인식, 성격 차이로 심각한 갈등에 빠졌다. 해결 과정에서 반전이 계속 되었는데, 결과는 정책의 통합이었다.

알렌 대 언더우드·헤론의 갈등

당시는 선교의 자유가 없는 개척기로 알렌의 공으로 제중원이 설립되고, 선교사가 정부병원 의사나 교사로 활동할 수 있는 특수 상황이었다. 갈등의 핵심은 공적으로 ‘합법적 준비론’ 대 ‘불법적 돌파론’이라는 선교정책의 차이의 문제였고, 사적으로는 알렌이 헤론에게 한국인 진료만 맡기고 고수익을 올리는 외국인 왕진을 독점한 것이 문제였다.

알렌은 법의 범위 안에서 활동하면서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기를 기다리자는 현실론자였다. 비록 제중원에서 전도할 수 없지만 씨를 뿌리기 전 땅을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왕실의 총애와 정부의 협조는 선교 초기에 필수적이라는 논리로 뉴욕 선교부의 지지를 받았다.

열정적 전도자 언더우드와 헤론은 알렌의 ‘위로부터 아래로’의 방법을 반대했다. 언더우드는 민중 대상의 직접 전도로 ‘아래로부터 위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선교의 자유가 없는 개척기에는 불법적인 전도가 차선책이며, 박해를 받더라도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문이 열린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첫 선교기관으로 1886년 5월 11일 정동 고아원(이후 경신학교로 발전)을 개설했다.

헤론은 제중원의 예산을 독단으로 처리하는 알렌을 비판했다. 알렌은 언더우드의 전도열은 높게 샀으나, 불법적 돌출행동이 어렵게 마련한 선교의 기초를 망치지 않을까 우려했다. 헤론은 알렌이 자신의 의술과 의견을 무시하고 제중원을 운영하며, 외국인 진료를 독점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알렌은 선교부에 언더우드를 위선자에 수다쟁이로, 헤론을 질투꾼으로 비난했다. 갈등의 첫 해결책으로 의사 한 명이 부산에 가서 선교지부를 개척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영국 불독’ 언더우드는 타자기로 알렌을 비판하는 편지들을 계속 써서 뉴욕에 보냈다. 뉴욕본부가 선교 사업의 기초를 마련한 알렌을 두둔하자, 언더우드는 1886년 9월 알렌 때문에 모든 어려움이 생겼으며, 규정을 어기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자와는 동역할 수 없다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헤론과 함께 북감리회로 가겠다고 알렸다. 헤론은 선교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을 아꼈다.

1887년 7월 알렌이 워싱턴 DC 한국공사관 설치를 돕기 위해 참찬관(서기관)으로 임명되어 2년 이상 한국을 떠나면서 갈등은 일단 해소되었다. 1890년 서울 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이어서 공사가 된 알렌은, 중도에 외교관으로 전업한 약점 때문에 지방에서 선교지부를 개설할 때 정치적인 분쟁이나 법적인 문제에서 선교사 편에 서서 도와주었다.

헤론 대 언더우드의 갈등

알렌이 미국으로 떠난 후 구리개 제중원 원장과 고종의 시의는 헤론이 맡게 되었다. 그러자 헤론은 알렌처럼 직접 전도에 대한 신중론자로 변했다. 왕실을 드나들고 관리들과 대화하고 환자들을 대하면서 보다 더 정세를 파악하게 된 결과였다. 1888년 봄 천주교 명동성당 건축 사태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북한지방 여행에서 전도하다가 서울로 소환되자, 헤론은 정동교회 예배 시간에 찬송 부르기를 금지했다. 1888년 여름 반기독교운동인 영아소동이 발생했다. 1889년 3월 언더우드가 제중원 여의사 호튼과 혼인하고 북부 지방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세례를 주지 않겠다는 딘스모어 공사와의 약속을 어기고, 4월 말 압록강을 건너가 의주 교인 33명에게 세례를 주자 헤론은 이를 비판했다. 언더우드는 중국 여권을 미리 가지고 가서 만주 땅에서 세례를 주었으므로 합법적인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과거 알렌과 헤론 분쟁의 핵심에 서울과 제물포 거주 서양인 외교관과 사업가들의 진료가 있었다고 보았다. 돈을 벌고 사교계에서 명성을 얻는 일을 알렌이 독점하고 헤론을 소외시키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이제 헤론이 외국인 진료를 담당하게 되면서, 점점 선교 본연의 의무를 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교회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1889년 10월 뉴욕의 선교부 총무 미첼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에도, 거리 설교나 전도책자 배포는 선교지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헤론의 의견과 이는 전도 예배를 방해하는 규칙이라는 언더우드의 의견이 대립했다.

언더우드는 헤론의 태도를 ‘과거 알렌의 병’으로 불렀다. 이교도 땅을 정복하러 왔다는 자기 정체성을 가진 청년 언더우드는 직접 선교를 추진한 강경파였다. 그는 가나안 열 두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조약과 법을 따라 선교 신중론을 주장한 헤론을 비판했다. 헤론도 언더우드를 조심성 없이 덤비는 열광자로 생각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헤론이 과로 중 이질에 걸려 병상에 있을 때, 언더우드가 불철주야 극진히 간호하면서 회복되었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지내던 과거로 돌아갔고,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평안히 죽었다. 다만 알렌은 헤론의 병상에 오지 않았고 화해하지 않았다. 헤론 부인은 게일과 결혼 후 서울을 떠나 원산에 거주하게 된다.

언더우드의 선교 정책 변신

언더우드는 1890년 여름 네비어스 선교사 부부를 초청하여 새 정책을 배우고, 이듬해 3자 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그의 직접 전도론의 승리였다. 그러나 정치 중심지 서울에서의 생활이 늘어나고 감리회의 사회학적 선교를 이해하게 되고, 의사인 아내와의 결혼 생활과 1893년 내한한 에비슨 의사와의 교제를 통해, 언더우드는 기독교 문명(왕국 모델)과 복음 선교(교회 모델)가 함께 가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 산물이 1897년 발간한 ‘그리스도신문’, 1904년 세브란스병원 설립, 1915년 연희전문대학의 설립이었다. 이 때문에 네비어스 정책을 고수한 평양의 마페트와 대립하였다. 문화(서울)와 예수(평양)의 대결은 1930년대 신사참배 논쟁까지 지속되면서 장로교회를 이끄는 두 날개가 되었다.

선교회 정책은 변한다. 알렌도, 헤론도, 언더우드도 변해 갔다. 헤론은 알렌을 비판하다가 이해하게 되었고, 언더우드와 친하다가 멀어졌으나 다시 화해했다. 분열로 세월을 허송한 해방 후 70년의 한국장로교회는 헤론의 화해 정신을 본받아 갈등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옥성득 교수(美 UC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