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기 사카에(1885∼1923)는 일본의 노동·민중운동가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조선과 일본의 진정한 융합을 바란 실천적 아나키스트였다. 민족적 편견이나 증오가 없는 이상 사회를 꿈꿨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러시아·중국·아프리카인들과 교류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 이동휘와 여운형 등을 만나 연대했다. 한국과 일본이 하나 되는 사회를 만들자며 재일조선인들과 흑도회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22세 때 전차요금 인상 반대운동을 벌이다 옥살이를 한 뒤 수차례 감옥을 들락거렸다. 감옥에 갈 때마다 외국어를 하나씩 익혀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을 섭렵했다고 하니 국제연대를 위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오스기의 삶은 일본의 집단광기에 무참히 짓밟혔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 때 일본 정부는 ‘조선인이 혼란을 틈타 방화하고 불순한 일을 벌인다’는 내용의 전보를 지방에 타전했다. 언론이 이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과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보도하자 일본 경찰과 군대, 자경단은 조선인을 가차 없이 살해했다. 이들은 조선식 복장을 입거나 일본어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죽였다.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희생됐다.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오스기 또한 표적이었다. 그는 그해 9월 16일 일본 육군 헌병대 장교에게 살해됐다. 일본군 장교는 오스기의 아내와 6살 난 조카마저 함께 죽여 우물에 던졌다.
92년 전 도쿄 스미다강을 핏빛으로 물들였던 집단광기는 사라졌을까? 신오쿠보 거리에서는 혐한 시위가 횡행하고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과 같은 극우 단체는 우토로 마을에 쳐들어가 겁박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19일 새벽 집단자위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일본은 다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나라로 변신했다. 집단광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김상기 차장 kitting@kmib.co.kr
[한마당-김상기] 오스기 사카에
입력 2015-09-21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