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쪽지 속 명단 28명… 그는 ‘사회’에 보복하려 했다

입력 2015-09-19 03:39 수정 2015-09-19 17:49

지난 9일 충남 아산의 한 대형마트에서 주모(35·여)씨를 납치해 살해한 뒤 시신을 불태운 김일곤(48)은 전형적인 ‘사회증오형’ 범죄자다. 척수장애 6급인 그는 배달원, 자동차 부품공장 근로자, 일용직을 전전했다. 임금 체불을 당하고 미수금 등을 받지 못해 사회에 대한 증오가 쌓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불친절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쪽지를 지니고 다녔다. 복수심에 불타던 그는 불특정 다수의 약자를 상대로 이를 해소하려 했다.

사회증오형 범죄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 4월 경남 진주에서 발생한 중국동포 대상 ‘묻지마 흉기 살인사건’이나 지난 5월 ‘예비군 훈련장 총기난사 사건’처럼 분노를 제삼자에게 폭발시키는 형태다. 전문가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하고 고립된 약자, 낙오자를 끌어안을 완충장치가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이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스물여덟 개의 이름

17일 경찰에 검거된 김일곤은 독일제 쌍둥이칼 두 자루와 커터칼, 그리고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갖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가로 15㎝, 세로 20㎝의 옅은 노란색 쪽지 2장에는 28개의 이름이나 직책이 적혀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치료했던 의사와 간호사, 물리치료사, 돈을 갚지 않은 식당 여사장, 자신을 조사했던 형사나 당시 참고인, 재판장 등이 그들이다. 특정된 사람도 있지만 ‘1992년 절도 당시 ○○경찰서 형사들’처럼 모호하게 적혀 있기도 하다.

경찰이 캐묻자 그는 혼잣말로 “이것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 “간호사는 나에게 불친절하게 대했고, 의사는 아픈데 나를 강제 퇴원시켰다. 식당 사장은 미수금을 갚지 않아서, 판사는 1998년 절도사건 때 나에게 징역 5년을 때려서”라고 장황한 이유를 댔다.

전문가들은 이 쪽지에 주목한다. 그가 전형적인 사회증오형 범죄자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본다. 김상균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쪽지에는 언젠가는 보복하겠다는 심리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며 “경찰서에 들어서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고 외쳤던 것도 살고자 하는 의지라기보단 보복을 해야 한다는 내면의 증오를 표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주씨를 살해한 것뿐 아니라 시체를 훼손한 것도 여성 혹은 사회에 대한 증오가 표출된 행위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빈곤층이나 소외된 사람들이 전체에 대한 원망을 여성 등 약자에게 푸는 전형적인 형태”라며 “주변인과 교류없이 고립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다”

김일곤은 2013년 5월부터 약 1년간 성동구 용답동의 한 노숙인 쉼터에서 지냈다. 18일 만난 쉼터 관계자는 “고집이 세고 집착증과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했지만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면서 “자신을 전과 7범이라고 소개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임금 체불 얘기를 많이 한 것으로 보아 사회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지내며 배달 일을 하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 다녔다. 함께 쉼터에 묵었던 130여명 중 정을 나눈 사람은 없었다.

이후 동작구 사당동에 주소지 등록을 하고 영등포구 대림동 등에서 살며 두문불출했다. 지난 8월부터 성동구의 한 고시원에 짐을 풀었다. 1평 남짓한 방에 월세 20만원을 주고 지냈지만 몇 번 들르지 않았고 주변 사람과도 말 한번 섞지 않았다고 한다. ‘트렁크 살인’ 이후에는 왕십리에서 택시를 타고 하남 방면으로 사라졌다가 16일 성동구로 돌아왔다.

그는 불리한 진술을 거부하거나 번복하고 있다. 시신에 불을 붙이고 달아난 이유로 “내 유전자가 남아 있어 범인으로 들통날 것 같았다”고 했지만 개 안락사약을 사려 했던 이유, 시신 훼손 이유나 과정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다. 유치장에 들어온 후 밥 한 끼를 먹지 않았고, 물을 줘도 던져버리는 등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자해 등 돌발행동에 대비해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경찰은 18일 김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편 경찰은 이번에 공을 세운 성동경찰서 성동지구대 김성규(57) 경위와 주재진(40) 경사를 각각 한 계급 특진 임용하고, 성동지구대 임채원(52) 경위 등 경찰관 6명에게 경찰청장 표창을 했다. 도움을 준 방모(50)씨 등 시민 2명에게는 ‘용감한 시민장’과 보상금을 수여할 예정이다.

김미나 김판 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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