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가 되면 국회 의원회관 1층 면회실엔 택배 상자가 수북하게 쌓인다. 소관 부처와 기관, 기업에서 보낸 추석선물이다. 의원실 직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카트에 선물을 실어 나르기 바쁘다. 오후 2시가 넘어가면 “언론사 카메라가 오기 전에 빨리 택배를 찾아가라”고 의원실에 ‘독촉’ 전화를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공직사회에서 올해 추석은 의미가 좀 남다르다.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고, 일명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기 전 마지막 추석이자 국정감사가 진행 중이라는 여러 상황이 어우러진 결과다. 국회 관계자는 18일 “추석선물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예년에 비해 고심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했다.
유력 정치인들의 선물 주고받기는 그 자체가 정치행위다. 어떤 품목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는지가 모두 정치적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 추석선물로 햅쌀과 흑미, 찰기장, 잣, 찹쌀 등 5종 농산물을 택했다. 청와대는 “고향의 정을 나누고 소망한 일이 다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밝혔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여야 의원들에게 ‘동서 화합’의 염원을 담아 영광굴비를 선물할 예정이다. 사무처 직원들에게는 홍삼을 돌렸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일찌감치 소속 의원들에게 와인을 선물했다. 와인병에 의원 개개인의 이름과 함께 ‘묵을수록 맛을 내는 와인같이 우리네 우정도 더욱 깊어가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새겼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고향인 경남 봉하마을 오리쌀을 선물로 정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여파로 전남 진도 특산물이 정치인들의 추석선물 1순위였던 것과 비교하면 올해는 종류가 훨씬 다양해졌다. 지역 특산물이 유독 많은 건 침체돼 있는 내수 경기를 살리자는 취지이면서 7개월도 안 남은 총선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이나 새정치연합 전 대표였던 김한길 의원처럼 명절선물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서 최고위원 측 인사는 “이달 초 새누리당 의원과 친분 있는 야당 의원들에게 송산포도를 돌렸다”며 “국감에 집중하기 위해 추석선물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김영란법을 심사했던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들은 “주변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국회가 공직자의 금품 수수를 금지한 법안을 통과시켜놓고 정작 명절선물은 다 받아 챙긴다는 비난 여론이 신경 쓰인다는 얘기다. 한 의원은 “아예 논란의 소지를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소관 기관에 선물을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래도 보내오는 선물은 가급적 돌려보낸다”고 했다.
서울대 박원호 정치학과 교수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과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멸치 선물은 여야를 막론하고 안 받아본 의원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며 “소소한 명절선물이 여야 관계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측면도 있는 만큼 김영란법이 시행되더라도 미풍양속을 잘 살려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했다. 바른사회시민회의 이옥남 정치실장은 “의원실마다 명절선물대장을 작성하고 있지만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밖에서 들여다볼 방법도 없다”며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를 투명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
[정치권 추석 선물] 보이지 않는 메시지… 선물의 정치학
입력 2015-09-19 0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