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성기철] 청바지가 어울리는 국회의원

입력 2015-09-19 00:03

대한민국 제1호 여성 정치인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과 초대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임영신이다. 5선 의원과 최초의 제1야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이 2호,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재선 의원을 거친 박현숙이 3호에 해당된다.

이들은 모두 한복 차림으로 국회에 출근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워낙 미미한 때라 남성들로부터 모욕당하기 일쑤였다. 임영신은 상공부 간부들로부터 “서서 오줌 누는 사람이 어떻게 앉아서 오줌 누는 사람한테 결재를 받느 냐”는 소릴 들어야 했고, 박순천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동료 의원들의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전통적 여성미를 갖춘 한복 이외의 옷차림새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확 깨버린 정치인이 7대 국회 이후 3선을 한 김옥선이다. 그는 대놓고 남장(男裝)을 했다. 양복에 넥타이 차림을 하고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다녔다. 남성 주도 정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 건 당연하다. 1990년대 이후 여성의원 수가 크게 늘면서 현대적 여성미를 뽐낼 수 있는 양장(洋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박근혜의 ‘공주패션’과 나경원·조윤선의 ‘귀족패션’이 호평 받는 시대다.

그런데 지난 주말 집(경기도 고양) 근처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유은혜 의원의 의정보고회에 갔다가 그의 예상 밖 옷차림새에 깜짝 놀랐다. 공식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정장 대신 청바지와 흰색 티셔츠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스티브 잡스처럼. 좀 무례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사라졌다. 지난 3년여 동안 오로지 을(乙)의 입장에서 민생현장을 누비며 의정활동을 했다는 설명에 딱 어울리는 복장이란 느낌이 들어서였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수많은 여성들이 금배지를 꿈꾸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지역구보다 당선이 용이한 비례대표를 노리는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비례대표는 절반을 여성에게 할당하기 때문에 진입 문턱이 훨씬 낮다. 여성 정치 지망생들이여, 자신의 명예가 아닌 국리민복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면 지금 당장 지역으로, 민생현장으로 달려 나갈지어다. 청바지도 좋고 반바지도 나쁘지 않다.

성기철 논설위원 kcs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