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단속 피하려 ‘입간판 숨바꼭질’… 설치 합법화한다더니 지자체 조례 개정 감감

입력 2015-09-18 02:41
서울 서대문구의 한 상가 앞에 17일 입간판 여러 개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단속이 나오면 옮기기 쉽도록 수레에 실려 있는 입간판도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1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상가 앞. ‘참치, 초밥’이라고 적힌 식당 간판이 수레에 실려 있었다. 누가 가져가기라도 할까봐 걱정됐는지 수레는 상가 건물 문고리에 쇠사슬로 묶어뒀다. 자물쇠도 굳게 잠겨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식당 주인 유모(52·여)씨는 “장사가 잘 안되는데 저렇게 간판이라도 내놔야지. 간판 없으면 식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휙 지나간다”고 말했다. 서대문구에서 15년째 식당을 해온 유씨는 가게 앞에 설치한 입간판 때문에 올해만 3차례 구청에 적발됐다. 3차 경고까지 받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 유씨는 결국 단속을 피하려고 간판을 수레에 실었다. 구청에서 단속을 나오면 수레를 건물 뒤 주차장으로 옮긴다.

서울 등 상당수 시·도에서 ‘입간판 합법화 조례’ 개정이 늦어지면서 상인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조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입간판 설치는 모두 불법이다. 그 사이 단속을 피하기 위해 자전거나 화물차에 광고물을 달아 가게 앞에 세워두는 ‘주차형 입간판’ 등 변종 입간판까지 등장했다.

조례 개정과 입간판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지난해 12월 상인들이 입간판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당시 국무회의를 통과한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은 건물부지 안에 입간판을 설치할 수 있게 하면서 각 시·도가 구체적 기준을 조례로 정하도록 했다. 무조건 금지가 불법 행위를 양산하는 만큼 제한적으로 허용하자는 취지였다.

실제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이 행정자치부에서 받은 불법 광고물 정비 현황을 보면 불법 광고물로 적발된 입간판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10만건을 넘었다. 별도로 집계되는 불법 에어라이트(풍선형 입간판)는 2013년 약 7만건에서 지난해 약 23만건으로 적발 건수가 3배 이상 늘었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에 맞춰 인천시는 지난 5월 가장 먼저 조례를 개정했다. 가게마다 규정에 맞는 입간판을 1개씩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부산과 대전에서도 관련 조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서울을 포함한 대다수 지방자치단체에선 아직 조례가 바뀌지 않았다. 이들 지역에서 입간판은 모두 불법으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단속에 나서기도 어렵다. 경기 침체에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까지 겪으면서 바닥으로 추락한 상인들 처지를 무시할 수 없어서다. 서둘러 조례를 개정하지 않은 책임도 적지 않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바로 단속하기보다는 입간판을 철거할 수 있도록 안내를 먼저 한다”고 했다.

상인들은 조례 개정을 늦추면서 입간판 단속에 나서는 지자체를 비판한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박모(29)씨는 “적절하게 광고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돼야 장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통행에 불편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입간판 설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연말까지 조례를 개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