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고 결정하겠다.” “내 집이니 총이라도 들고 싸웠을 것이다.”
시리아 난민 니코스(35)와 스렐리우스(36)를 만난 것은 15일 밤 8시(현지시간) 그리스 레스보스섬 미틸리니 여객선 터미널이었다.
레스보스섬은 이웃 국가 터키에서 10∼15㎞ 거리에 불과한 인구 10만여명의 휴양지이지만 6∼7년 전부터 난민이 끊임없이 유입돼 이제는 대표적인 ‘난민 섬’이 됐다. 지난달 24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시리아 난민 수용 발표로 하루에도 수백∼수천명이 보트 등 각종 선박을 통해 레스보스 해안에 닿는다.
니코스와 스렐리우스는 친구 사이다. 보름 전 가족과 함께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떠났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각각 은행원과 목수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을 등졌다.
이날 밤 미틸리니항에서 그리스 본토 아테네로 향하는 대형 여객선이 뱃고동을 울리며 떠났다. 난민 수천명이 그 배에 몸을 싣고 ‘꿈의 나라’ 독일을 목표로 대장정에 들어갔다. 니코스와 스렐리우스는 항구에서 노숙한 뒤 다음날 떠나기로 했다. 예약이 밀려서다.
‘왜 조국을 떠나는가.’
이 물음에 니코스는 “조국 시리아를 사랑하지만 미래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스렐리우스는 “싸우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적들이 당신 나라를 침공했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엔 총 들고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난민 루트’를 통해 만난 대부분의 시리아 난민은 이 같은 복잡한 심정의 국가관을 드러냈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로 일했다는 젊은 여성 리바이니(32)는 “무차별 폭격, 어린이·여성도 가리지 않는 잔혹한 폭력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렸다”며 “독일을 두어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 거기에 정착하려 한다”고 말했다. 리바이니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고교생 와즈니버스(18)는 “시리아에 남았으면 교외로 끌려가 죽었을 것”이라며 “독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겠다”고 했다.
항구 옆 난민수용소에서 만난 고교생 호세아바(19)는 “삼촌과 친구가 반군에 죽는 걸 목격했다”면서 “사랑하는 가족을 더 잃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호세아바와 함께 있던 친구 아하마드는 “(이곳으로 오기 직전) 터키 경찰이 우리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일부러 난민 배를 가라앉혔다”고 흥분했다.
건축사사무실에서 근무했다는 사파르(30)는 “시리아는 법도 없고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저 권력 있는 사람들 앞에 짐승일 뿐”이라며 처절한 얘기를 쏟아냈다. 그는 “매일 비행기 굉음과 폭탄이 삶을 짓밟아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돼 있다”고 했다. “고향은 좋지만 당분간 조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고향과 조국이 왜 다른가’라고 물었더니 “조국은 40여년간 탐욕스러운 정치가들의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를 붕괴시켜 더는 살 곳이 못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두 살배기 아들을 안고 있었다.
방사선과 의사 데르즈르(45)는 루마니아에서 10년간 의학 공부를 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 사회 중산층 이상이자 엘리트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은 유럽사회 공동체와 섞이지 않는 이슬람인들의 종교와 문화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다’고 설명하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시리아는 기독교와 상관없이 유럽인을 좋아한다”면서 “사우디아라비아에도 크리스천이 있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신은 한 명이므로 (난민이 유럽사회에 정착해도)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날 밤. 배가 떠나고 항구는 거대한 여름 캠핑장이 된 듯했다. 항구에서 2㎞ 떨어진 ‘시리아난민수용소’에서 난민 수속 절차를 거쳐 온 이들이기에 한결 자유스러워 보였다. 이들은 항구 인근 상가에서 쇼핑을 하고 차를 마셨다. 상가와 운수업계만 난민 특수를 누렸다. 반면 레스보스섬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은 ‘난민 쇼크 직격탄’을 맞아 한 해 장사를 망쳤다. 미틸리니시내 한 레스토랑 주인 레나(50)는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난민 행렬로 당장 우리 섬의 경제적 타격이 너무 크다”면서 “그리스 정부도 20일 총선을 앞두고 3만명이 머물던 섬 난민을 전부 실어 국경으로 데려갔다”고 설명했다. 정치문제화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앞서 이날 낮 취재진은 1만명이 수용돼 있다는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를 찾기 위해 두어 시간을 헤맸다. 모리아난민수용소였다. 이들 역시 총선을 앞두고 대부분 떠난 상태여서 수백명만 남아 있었다. 이 수용소는 미틸리니에서 10여㎞ 떨어진 깊은 산 속에 있었다. 시리아 난민과 대조적으로 이들은 행색이 초라했다.
시리아 난민촌에는 ‘국경없는의사회’ 같은 비정부기구(NGO)와 자원봉사자 등이 활동하는 반면 아프가니스탄 난민은 염소몰이 하듯 산 속에 모아놓고 경찰이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아버지가 딸을 안고 말했다. “탈레반의 위협을 피해 이란에서 죽을 고생 하며 피난살이를 하다 1500달러(약 175만원) 뱃삯을 주고 터키에서 보트로 이 섬에 들어왔다”며 “아프가니스탄 난민이건, 소말리아·이라크·시리아 난민이건 돈이 있고 없음에 따라 난민 계급이 나뉜다”고 씁쓸해했다.
이 같은 도피성 난민 현상은 해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에일란 쿠르디 사건으로 인해 시리아 국적을 지녔다는 것만으로 난민 지위가 부여되면서 본격화됐다. 이로 인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유럽 선진국가에서 살려는 도피성 난민층이 늘었다. 일부 브로커들이 이를 사업화하고 있다는 것이 서방 언론의 분석이다. 독일의 경우 난민 지위를 얻으면 주택과 월 생활비 125유로(약 16만4000원), 무상교육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16일 오전 미틸리니에서 75㎞ 떨어진 시캄냐스 마을 해변. 난민이 벗어놓고 간 구명복이 해변마다 벌겋고 산언덕 쓰레기처리장에선 불도저가 구명복 청소를 하고 있었다. 시캄냐스 해변을 통해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난민들이다. 미틸리니로는 브로커를 통해 1인당 수천 달러를 준 난민이 요트와 보트 등으로 상륙하고 이 해변으로는 무동력선에 의지해 상륙하는 이들이 많다. 이마저도 정원 초과이다 보니 사고가 잦다. B급 난민으로 분류되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상대적으로 많은 곳도 여기다.
이들은 도착해 ‘신의 가호’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내 미틸리니 항구까지 75㎞ 대장정에 나선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자 일행이 미틸리니로 향하던 중 렌터카 뒷좌석에 고단한 여정을 2시간째 하고 있는 시리아인 무하마드 알리(47) 가족을 태웠다. 알리는 처음 본 동양인이 두려운지 땀을 뻘뻘 흘렸다. 손짓 발짓 해가며 안심시켰으나 그는 차창 밖 걷고 있는 사람이 친구라며 같이 걸어가겠다고 했다. 말릴 수도 없었다.
레스보스(그리스)=
글·사진 전정희 특파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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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9-18 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