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동북부 필라델피아주(州) 랭커스터의 제일감리교회(First United Methodist Church). 1802년에 세워진 이 교회는 한국에 감리교 씨앗을 뿌린 아펜젤러(1858∼1902)가 파송되기 전 신앙생활을 한 곳이다.
교회 곳곳에는 아펜젤러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예배당 옆에는 아펜젤러 기념관이 위치해 있었다. 기념관은 교회 역사상 해외 선교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아펜젤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7년 전 건립됐다. 강대상 뒤엔 서울 정동제일교회가 기증한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정동제일교회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교회로 한국의 모교회 중 하나다.
이날 아펜젤러의 흔적은 교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 보관실에는 아펜젤러가 한국 선교 초창기에 보내온 선교 보고 일부가 보관돼 있었다. 매년 봄엔 아펜젤러 추모 행사도 열린다고 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중 안식년을 보낼 때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한국에서 태어난 그의 큰딸 앨리스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조셉 디파올로 담임목사는 “아펜젤러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 평신도 설교자로 1년간 봉사하며 뜨거운 체험을 성도들에게 전했다”면서 “어린 시절 아펜젤러가 머리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때는 가슴으로 믿게 된 신앙을 설교했다”고 전했다.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220㎞ 떨어진 뉴저지주(州) 드류신학교에도 아펜젤러의 행적은 남아 있었다. 이 학교는 아펜젤러가 젊은 시절 수학한 곳이었다. 캠퍼스에 들어서니 그가 생활한 기숙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풍스런 2층짜리 건물이었다.
고문서실엔 아펜젤러가 1881년 대학 입학 당시 자필로 쓴 자기소개서가 보관돼 있었다. ‘1858년 펜실베니아주 수더튼에서 태어났다. 1879년 감리교인이 됐다….’
그가 한국에서 이 학교로 보낸 선교 편지도 보관돼 있었다. 아펜젤러는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미국 교계에 조선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고문서실 관리자인 크리스토퍼 앤더슨씨는 “아펜젤러의 글을 통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미국에 알려졌다.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해외로 파송됐다”며 “아펜젤러는 해외 선교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다음날 랭커스터의 한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은 비폭력주의와 공동체 영성을 추구하는 ‘아미쉬’ 사람들, 비슷한 성향의 ‘메노나이트’ 사람들이 뒤섞여 사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안내한 윤사무엘 감람산선교신학교 총장은 “메노나이트는 사회봉사 선교 상부상조 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라며 “아펜젤러가 보여준 숭고한 박애정신도 메노나이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아펜젤러는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한 뒤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아펜젤러의 ‘빈 무덤’엔 이러한 박애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30년 전인 1885년 한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도착한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1859∼1916)는 소속 교단의 교리만을 내세우지 않았다. 서로 협력해 교회 병원 자선기관 학교를 설립했고 놀라운 에큐메니컬 정신을 보여주었다.
김진홍 뉴브런스윅 신학교 교수는 “북미의 다문화·다교파 환경에서 자란 두 선교사는 성장 과정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미리 체험한 인물들이었다”며 “두 사람은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 현장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활동했고 한국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언론인들의 미국 취재를 후원한 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은 달랐지만 서로 하나를 이뤄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봤다”며 “지금 한국교회도 그분들처럼 분열을 뛰어넘어 서로 연합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랭커스터(미국)=글·사진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크리스천 코리아’ 만든 선교사의 美 발자취 찾아서] (下) 아펜젤러
입력 2015-09-17 0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