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명희] 첫 단추 잘못 꿴 무상보육 부메랑

입력 2015-09-17 00:00

직장에 다니는 A씨(36)는 네 살배기 딸을 이모에게 맡기고 있다. 아이가 9개월이 될 때 서울 송파구 어린이집에 신청을 했지만 35개월째 접어든 지금까지도 순번은 400위권 밖이다. 강남·서초·송파구 등의 건물 임대료가 특히 비싸다보니 어린이집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정부가 0∼5세 영·유아에 대해 전면 무상보육을 해주겠다고 나서면서 전업주부들이 집에서 돌보던 아이들을 대거 어린이집으로 보낸 탓이다.

가정에서 0∼2세 영아를 직접 돌보면 월 10만∼20만원의 양육수당을 지원하지만 어린이집에 맡기면 종일반 비용(월 41만∼78만원)을 지원한다. 그러다보니 전업주부들 사이에 ‘어린이집을 이용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퍼졌고, 전업주부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꿰차면서 정작 도움이 절실한 직장맘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A씨도 대기자만 수백명에 이르는 어린이집 입학은 포기하고 다섯 살이 되는 내년에는 유치원에 보낼 생각이지만 유치원 입학도 ‘하늘의 별’ 따기여서 걱정이 태산이다.

무상보육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표를 잡기 위해 정치권이 낳은 ‘무상’ 시리즈 중 하나다. 정치권은 선거를 앞두고 ‘무상급식’ ‘고교 무상교육’ ‘기초연금’ 등 경쟁적으로 복지공약을 쏟아냈다. 2012년 0∼2세 영아에 대해 실시하기로 했던 무상보육 공약은 국회를 거치면서 첫 시행된 2013년 5세 이하까지 확대됐다. 소득 하위 70%로 대상을 제한하고 근로상태나 취약계층 여부 등에 따라 차등 지원하기로 했던 정부 방침도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박재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은 “우물물을 뒷사람 생각해 적당히 떠 마셔야지 자기 차례 왔다고 해서 탐욕스럽게 다 퍼마시면 뒷사람에게 돌아갈 게 없다”고 경고했을 정도. 하지만 표에 눈먼 정치권에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그러는 사이 보육예산은 2009년 3조6000억원에서 올해 10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뒷감당이 어려워진 정부가 내년 7월부터 전업주부들의 0∼2세 자녀에 한해 어린이집 이용시간을 하루 6∼8시간으로 제한하기로 하자 전업주부들의 반발이 거세다. 인터넷에선 전업맘과 직장맘 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을 정도다. 나라 곳간은 생각지도 않고 표심만 노린 정치권의 포퓰리즘 공약이 오늘의 사태를 불렀다. 한번 시행한 복지정책은 수혜자들이 있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애초부터 복지정책을 정교하게 짜야 하는 이유다.

무상보육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부모 소득이나 취업 여부, 자녀 수 등에 관계없이 천편일률적으로 보육수당을 지원하는 국가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등은 소득이나 가족 수 등에 따라 차등 지원하고 있고, 프랑스는 취업 여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은수저 물고 태어난 ‘이건희 회장 손자’까지 국민 세금으로 키워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세계 꼴찌 수준인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무상보육을 하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문화나 사교육비 등 출산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몇 십만원 보육수당을 쥐어준다고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우리나라의 내년 나랏빚은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0%를 넘어선다.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콤한 복지에 취해 흥청대던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문화재까지 내다 파는 수모를 겪는 것을 우리는 지켜봤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내세웠던 영국은 고소득층에 대한 아동수당을 삭감하고 캐머런 2기 정부 들어서도 ‘일하는 복지’를 강조하며 복지 대수술에 나섰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