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유책주의’ 유지] ‘약자’ 일방적 희생 우려… ‘뻔뻔한’ 이혼청구 불허

입력 2015-09-16 02:05

‘부부관계 파탄을 야기한 사람도 배우자에게 이혼을 청구할 수 있나?’ 쉽게 답하기 힘든 주제를 두고 대법관 13명의 의견도 판이하게 갈렸다. ‘시기상조’라는 결론이 다수의견이 됐지만 1명 차이에 불과할 정도로 찬반 의견이 팽팽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해 다수의견을 낸 7명의 대법관은 여전히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아내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반면 소수의견을 낸 대법관 6명은 현실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혼인관계는 법적으로 정리해 주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파탄주의 도입하려면 법률적 보호장치 먼저 마련해야”=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15일 ‘유책주의’를 채택한 기존 판례를 변경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주된 근거는 쌍방이 동의하면 가능한 협의이혼 제도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혼인파탄에 책임이 있는 유책 배우자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설득해 협의이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재판상 이혼에까지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보장해 줄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 전체 이혼 중 77.7%가 협의이혼이라는 구체적 수치도 제시했다.

대법원은 파탄주의를 도입한 다른 나라들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단순히 비교하기도 어렵다고 봤다. 책임 유무와는 관계없이 혼인관계 회복 가능성만을 이혼의 척도로 삼는 파탄주의 도입 국가들은 대부분 협의이혼이 불가능하다.

또 파탄주의 도입국은 상대방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예컨대 영국과 독일은 상대방 배우자나 자녀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경우 이혼을 제한하는 가혹조항을 두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혼 후 상대방에 대한 부양책임 등에 대해 법률조항이 마련돼 있지 않다.

양 대법원장은 “상대방 특히 (경제적·사회적 약자인) 여성 배우자가 유책 배우자인 남편에 의해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여성 배우자가 남편에 의해 쫓겨나는 축출이혼을 방지한다는 유책주의의 순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간통죄 처벌 조항마저 사라진 마당에 유책주의를 없앨 경우 사법부가 중혼을 사실상 용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예외적 파탄주의 범위는 확대…책임상쇄 기준은?=그렇다고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회복 불가능한 혼인관계는 이혼으로 해소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6명 대법관의 반대의견은 이번 판결에서 예외조항 확대로 반영됐다. 최초로 예외사유를 인정했던 1987년 이후 28년 만이다.

대법원은 지금까지 상대 배우자가 보복의 감정으로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라면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도 받아들였다. 한쪽 당사자가 다시 함께 살 마음이 없으면서도 유책 배우자인 상대방을 최대한 괴롭히겠다는 생각으로 이혼에 반대하는 경우는 유책주의 원칙의 예외로 삼은 것이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이 범위를 더 확대했다. 우선 이혼을 청구하는 유책 배우자가 자신의 책임을 상쇄할 정도로 배우자나 자녀를 보호·배려한 경우다. 세월이 지나면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 경우도 예외사유에 포함됐다. 부부관계가 파탄 날 당시 유책 배우자의 잘못과 상대 배우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무뎌진 경우다.

대법원은 예외사유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유책 배우자의 책임의 정도와 혼인 후 구체적 생활관계, 별거기간, 별거 후 형성된 생활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추상적 기준만을 제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어떤 사람에게는 별거가 고통으로 점철된 10년일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이제는 용서할 수 있는 5년이 될 수 있다”며 “각각의 사건마다 개별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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