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1859∼1916)와 아펜젤러(1858∼1902)가 상선을 타고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조선은 척박한 땅이었다. 당시 26세였던 언더우드는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주여 지금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올해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지난 7∼12일(현지시간) 그들이 선교사로서의 꿈을 키운 미국 동부지역을 찾아갔다.
◇그로브개혁교회와 뉴브런즈윅 신학교=7일 방문한 미국 뉴저지주 허드슨 카운티 북부의 노스버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곳이다. 1859년 7월 19일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언더우드는 프랑스에서 2년 동안 학교에 다니다 12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곳에는 그가 학창시절 다녔던 그로브개혁교회가 남아있다. 언더우드는 숨진 후 이곳에 묻혔지만 그의 시신은 1999년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이장됐다. 현재 이곳에는 언더우드의 묘역과 비만 남아있다.
이 교회 목회자였던 윌리엄 아우구스투스 캔 마본 목사는 언더우드가 학창 시절 신앙의 스승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마본 목사는 언더우드가 1877년 뉴욕대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 개인지도를 했다. 언더우드가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등록한 직후인 1881년 이 학교의 신학 교수로 선임돼 언더우드를 가르쳤다. 언더우드는 졸업 후 한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인 1884년 11월 뉴브런즈윅 제일개혁교회에서 마본 목사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지의 땅, 한국을 선교지로=8일에는 필라델피아 미국장로교 역사연구소를 찾았다. 이곳에는 언더우드의 한국 선교 활동에 관한 자료가 많이 보관돼 있었다. 1880년대 미국 개신교는 절박한 심정으로 해외 선교에 힘썼다. 선교사를 배척하던 국가들이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하자 미국 선교사들은 열린 문이 닫히기 전에 복음을 심어야 한다며 해외로 나갔다. 언더우드 역시 당초 인도로 선교를 떠날 계획이었다. 언더우드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재학 시절 앨트먼 목사의 보고서를 접하고 선교지를 한국으로 바꿨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는 1200만명의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후일 “인도 선교를 결심한 뒤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고백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선교를 금지했다. 언더우드는 알렌 선교사가 세운 제중원(광혜원)에서 환자들을 돌봤다. 고아원을 세워 부모가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교육했다.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도 편찬했다. 서민들이 쓰는 한글이 기독교 복음 전파에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언더우드가 신학을 공부한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지난해 언더우드의 업적을 기리고 연구하기 위해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센터’를 설립했다. 초대 센터장인 김진홍 뉴브런즈윅 신학교 교수는 “복음 전도에만 머물지 않고 장기적 비전을 갖고 ‘크리스천 코리아’를 만들려 했다는 데 언더우드의 독보적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천 코리아는 복음 전파에만 머물지 않고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세대를 설립하고, YMCA를 세운 것도 이런 맥락이다.
언더우드는 57세를 일기로 죽기 전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가, 거기(한국) 갈 수 있을 것 같아.” 언더우드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다.
국내 11개 언론사의 미국 취재를 지원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담임목사는 “한국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보여줬던 기독교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뼈를 깎는 회개를 통해 다시금 민족과 사회의 희망과 소금, 등불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노스버겐(미국)=글·사진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크리스천 코리아’ 만든 선교사의 美 발자취 찾아서] (上) 언더우드
입력 2015-09-15 0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