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제중원이 1년을 맞이하자 알렌과 헤론은 영어로 첫 연례보고서를 작성해 미국장로회해외선교부와 미국 공사관 등에 제출했다. 이는 단순한 의료 사업 보고서가 아니라, 서양 근대 의학 체계로 한국인 환자와 질환을 분류, 분석 체계화한 첫 문서였다. 이 때부터 한국인의 질병이 서양의 질병으로 분류·명명되었다. 이 작업은 두 의사가 했지만 헤론의 수고가 많이 들어갔다.
보고서의 앞부분에서 알렌은 병원 설립과 1년 간의 역사를 서술했다. 1886년 봄에 5000명의 환자가 찾아올 정도로 제중원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헤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의학이 한국에 빨리 수용된 이유는 민영익의 회복에서 보듯이 외과수술의 효과 때문이었다.
진료소 환자는 소화기계, 비뇨기계, 발열 순
첫 해 진료환자 1만460명(초진 약 7000명)은 18개 질환 계열로 분류됐다. 질환계통과 환자가 진료된 병명은 다음과 같았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열거해본다. 발열(매일열 외 12종 1147명) 중 4일열(713명), 소화기계(이질 외 29종 2032명) 중 설사(306명)와 소화불량(582명), 순환기계(각혈 외 5종 111명), 호흡기계(천식 외 15종 476명), 신경계(반신마비 외 35종 833명) 중 간질(307명), 임파선계(경부임파선비대 외 1종 214명), 비뇨생식계(연성하감 외 29종 1902명) 중 매독(760명), 전신 질환(류머티즘 외 12종 365명), 새로운 병(음낭의 부분적 오한 외 1종 7명), 눈병(녹내장 외 22종 629명), 귓병(난청 외 6종 318명), 종양(비강폴립 외 8종 145명), 골관절계(손목 골절 외 36정 105명), 외상(화상 외 16종 140명), 기형(순열 외 4종 37명), 결체조직계(전신 농양 외 30종 363명), 피부계(옴 외 38종 815명), 부인병(백대하 외 11종 67명), 미분류 721명 등 합계 1만460명. 첫 해라 서양 의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비분류’ 환자도 721명이 존재했다. 당시엔 현미경이 없어서 디스토마 환자 등이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화기계가 1위, 비뇨생식계가 2위, 발열이 3위였다. 소화기계에 기생충 환자를 포함하면 단연 1위였다. 풍토성 간헐열인 매일열(177명), 3일열(171명), 4일열(713명)만 1050명이 넘었는데, 이는 한국에서 흔한 학질이었다. 헤론과 알렌은 말라리아로 보았으나 보고서에 말라리아 항을 마련하지 않은 이유는 겨울에 발병하는 4일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센병(나병)도 58명을 치료했다.
한국인 사망자의 절반은 천연두 환자였다. 제중원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환자의 고름을 코에 넣는 방법으로 예방 접종을 실시했다. 아직 여의사가 없어서 여자 환자는 700명에 불과했다.
재진 환자는 대개 매독성 환자들로, 말라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200명 이상이 임질이나 매독 환자였다. 이는 개항과 함께 진출한 일본인과 중국인 상인들의 매춘녀나 현지처 등을 통해 성병이 제물포와 서울에 상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성병의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 환자가 늘어났고, 수은으로 치료하는 한의들에 비해 제중원의 치료법이 효과가 있어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매독은 1910년 특효약 ‘606’이 나올 때까지 많은 한국인을 망가뜨렸다.
한편 학질(간헐열) 특효약으로 ‘키니네’가 알려지면서 제중원에서는 10알에 500푼에 판매했다. 키니네는 음역하여 ‘금계랍(金鷄蠟)’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학질에 사용하던 호랑이 눈알이나 가죽 대신, 서양 의학 도입과 더불어 금색 닭이 학질을 잡았던 것이다.
수술 입원 환자
보고서에는 265명의 수술 입원환자를 분석 기록했다. 이들 중 6명만 사망하는 좋은 결과를 얻었다. 가장 오래 입원했던 환자는 58세 여성으로 13번을 입원했다. 그녀는 대농포진 환자로 122일 입원 후 퇴원했다.
외과 수술의 효과가 소문이 나자 찾아오는 환자가 늘어 진료실에서도 수술을 했다. 마취는 한국인 조수가 클로르포름으로 했다. 손발을 절단하는 수술은 환자들이 꺼려 시행되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이나 발가락 절단 수술은 가능했다.
백내장 수술 등 눈 수술이 인기가 있었다. 안구제거 수술과 홍체 절제술 등은 안과전문의는 아니었지만 외과수술에 능한 헤론 의사가 한 듯하다. 1885년에 벌써 눈 수술이 시행된 게 놀랍다. 백내장이나 녹내장 수술 후 시력이 회복되면 기적으로 알려졌고, 선교사의 서양 의술의 우수성을 증명했다.
매독과 함께 동성애자의 항문 매독 환자도 상당수가 치료를 받았다. 피해자는 소년들이었다. 궁궐의 환관이 임질에 걸려 치료를 받았다. 성도덕이 문란한 시절이었다.
강도에게 중상을 입은 세 명의 환자가 수술 후 두 달 가까이 입원했다. 근육을 다쳐 팔을 잃을 위험에 처한 한 환자는 수술 후 완치되었다.
헤론과 알렌의 제중원 첫 해 보고서는 서양 의학의 도입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헤론은 보고서의 출간을 기다리던 4월 8일 작성한 편지에서 의료 활동 결과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났고, 서양 의학에 대한 편견이 깨어졌으며, 선교 사역의 문이 열렸다고 평가했다.
선교부에서도 제중원에서 이루어진 첫 해 사역에 대해 “이것이 바로 장로회 선교사들이 한 일”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헤론으로서는 성공과 은총의 한 해였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4) 1886년 제중원의 첫 연례보고서
입력 2015-09-15 00:23 수정 2015-10-26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