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개화기와 독립운동, 해방 이후 근대화 속에서 정신·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교회의 공헌과 향후 과제를 제시할 시점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계에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성백걸 백석대 교수는 지난 8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코리아나호텔에서 이승만 기념영화 제작을 추진하고 있는 전광훈 목사를 만나 국민일보 목회자포럼 창립 기념 릴레이 대담을 진행했다.
대담=성백걸 백석대 교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운동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을 전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선 잘못된 역사관 때문에 사상적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70년 전 대한민국의 설계도를 그린 지도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대한민국의 설계도와 건국 정신·이념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잘 모르니 사회 여러 영역에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을 북침이라 하고, 미군철수를 외치는 ‘평양식 역사관’은 국가 입장에서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이 잘못된 역사관을 따라 가면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감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다. 이승만의 건국정신을 전 국민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이승만의 사상은 기독교 개종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기독교를 만나게 된 과정을 설명해 달라.
“이승만은 1875년 양녕대군의 16대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서울로 왔는데 머리가 좋아 어린 나이에 과거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나 당시 과거에 합격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음에도 온갖 부정부패로 인해 11번이나 낙방했다. 절망하던 그에게 희망을 보여준 이들이 선교사였다. 이승만은 1895년 배재학교에 입학해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조선이 영국처럼 왕실을 명예직으로 하고 실제 정치는 공화정, 입헌군주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9년 이승만은 반정부 시위를 선동해 고종 폐위운동을 하고 공화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혐의로 한성감옥에 갇혔다.”
-이승만의 비판은 오랫동안 지속된 왕정체제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옥중 회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한성감옥에 있던 기간은 5년 6개월이다. 사형을 언도받고 추운 겨울 동사 직전까지 갔다. 그때 최초로 서원기도를 드렸다. 그 내용은 ‘내가 배재학교 때 영어공부를 위해 배운 예수님, 저를 만약 살려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살겠습니다’라는 것이다. 서원기도 후 땀을 뻘뻘 흘리며 강력한 성령체험을 한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성경과 영어를 깊이 배운다. 훗날 선교사의 추천으로 고종의 친서를 갖고 특사자격으로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
-배재학당 때 문자로 인식했던 복음이 한성감옥에서 인격화 됐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복음이 심장에 박히는 사건인데, 그 의미를 평가해 달라.
“한성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것과 같은 체험적 사건이다. 영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 사건이 그의 삶을 결정지었다. 한 국가의 독립과 건국과정의 기초를 쌓을 수 있었던 힘은 학문이나 이론이 아닌 체험적 신앙에 있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과 활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승만은 조지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공부한 과목 중 50%는 신학이었다. 프린스턴대에서 공부할 때 담당교수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독립시키기 위해선 워싱턴 정가를 설득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기독교인을 만날 때마다 ‘한민족은 5000년 동안 침략전쟁을 벌인 적이 없다. 그런데 일본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당신들이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나온 배경에 이승만의 영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승만의 국정철학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한·미동맹, 시장경제 체제,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분명한 국정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부터 로마까지 인류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가 가장 건강한 국가가 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승만 재평가 운동을 전개하면서 그를 통찰력 있는 지도자라고 강조하고 있다. 해방 이후의 상황에서 그가 직면한 현실은 어땠는가.
“이승만은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책을 통해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미리 예측했다. 1945년 8월 해방됐을 때 한국에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세력, 일제 강점기 지주계층을 중심으로 한 한민당 세력, 또 다른 세력인 미소공동회의 추종파가 있었다. 우리나라 국민의 다수는 중국 소련 유학파 출신인 지식인층의 영향 때문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5%가량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규합해 대한민국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소공동회의의 개입이 한국에 유리했다고 보나.
“미소공동회의의 주된 요지는 남북좌우 합작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좋은 것 같지만 공산권에 국가를 편입시키는 무서운 논리가 숨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을 제압하는 데 연합군 사망자가 소련군 사망자보다 훨씬 적었다. 복잡한 국제정치 구도상 미국은 소련의 기여도를 인정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련과 의견을 조율하며 한반도에 합작정부를 세우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김구 여운형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지도자도 합작정부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달랐다. 합작정부를 세우면 공산화가 된다는 것을 미리 알고 결사반대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맡길 수 없다며 유엔에 밀사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건국논의가 미소공동회의에서 유엔으로 옮겨졌다. 이게 대한민국 건국의 결정적 기반이 됐다. 결국 유엔 선거감시단의 관할 아래 남북 총선거를 추진했다. 이승만은 이것을 받아들였지만 김일성은 반대했다.”
-한국사, 한국교회사에서 이승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지도자마다 과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승만이 없는 대한민국은 생각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하늘이 내린 준비된 사람에 의해 기독교 문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불교와 유교문화가 강한 극동아시아에서 유독 한국만 기독교인이 다수다. 기독교인이라면 이승만을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그의 사상을 재평가해야 한다.”
-이승만의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대한민국 국가 시스템의 기초를 기독교 진리로 삼으려 했다. 대표적 사건이 제헌국회 때 의장으로 나와 기도로 회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기독교 성장의 인프라를 구축한 상징적 사건이다. 크리스천은 기도로 대한민국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 이승만과 정치인 이승만을 평가해 달라.
“그는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성령체험을 하고 40여명을 전도했다. 이승만은 선교사의 추천으로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마지막 임종기도는 ‘주님, 저는 이제 너무 늙어 주님의 일을 못합니다. 제가 주님 나라에 갑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을 주님의 손에 의탁합니다’였다. 정치인 이승만, 그리스도인 이승만으로 절대 분리시킬 수 없다.”
-영화제작 계획과 상영 후 기대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승만 영화는 대한민국 건국에 초점을 맞춘다. 시간은 2시간10분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내년 8월 15일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면 다수의 국민들이 대한민국 건국이념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영화 ‘연평해전’처럼 국민들이 그동안 잘못된 인식에 경도돼 있었다는 의견도 나올 것이다. 기독교는 대한민국 건국을 하나님의 사람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그 중심에 한 인간의 진솔한 신앙고백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의 위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국민일보목회자포럼 창립기념 교회 지도자 초청 릴레이 대담 ⑤] 전광훈 이승만영화제작추진위 대표회장
입력 2015-09-14 0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