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독일 통일, 외교의 산물

입력 2015-09-10 00:20

1980년대 중반 미국 워싱턴에서 만난 국제정치학자들은 “한국이 독일보다 먼저 통일될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논지는 간단했다. 대부분 유럽 국가는 세계 제1·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戰犯) 국가’ 독일이 통일돼 다시 강한 나라로 부활하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은 통일되더라도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남북한이 잘만 협의하면 통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저명한 학자들의 예측과 달리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인데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됐다. 1989년 11월 9일 동서독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불과 1년도 안 돼서다. 갑작스러운 이 통일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독일 통일 후 국제정치학자들은 ‘통일은 정교한 외교의 산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독일의 정치평론가 칼 카이저는 저서 ‘독일 통일’에서 “세계역사에서 외교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만으로 독일 통일이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독일 통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0여개월간 치러진 ‘외교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한 서독의 치밀한 외교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5년 6월 5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베를린에서 ‘독일의 패배와 연합국의 최고권위에 대한 선언’이라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 문서는 독일을 분할하고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 4개국이 독일을 지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독일에 갖고 있던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베를린에서는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이들 4개국은 냉철한 계산에 들어갔다. 미국은 분단된 독일보다는 서독이 주체가 된 통일독일이 세계 경영에 유리하다고 봤다. 미국은 통일독일을 자신들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남게 해 영향력 확대를 가속화하기로 했다. 소련의 생각은 달랐다. 동독 공산당의 개혁을 독려해온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지만 동독을 잃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동독의 민주화에는 긍정적이었지만 독일 통일에는 손사래를 쳤다.

독일 통일을 향한 헬무트 콜 총리의 ‘위험한 도박’은 도처에 도사린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콜 총리는 미국을 적극 활용했다. 콜 총리가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전화 통화한 것만도 수백 통이 넘는다. ‘몰타’ 미·소 정상회담과 유럽특별정상회담 등을 앞두고 두 정상은 끊임없이 정보교환을 했고 단계별 전략을 짜나갔다. 콜 총리 등 독일 통일 과정을 이끌었던 이들의 회고록에는 숨 가쁘게 진행된 당시 외교전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군대가 전투를 준비할 때 두 가지를 한다. 첫째는 상황을 예상하고 세부 대응계획을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자원을 동원하는 일이다. 외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외교에 있어 세부계획은 전쟁에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한반도에서도 통일 논의가 시작된 지 오래다. 독일처럼 국제법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지분을 가진 강대국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 이해관계는 당시 독일의 국제적인 상황 못지않게 복잡하다. 2년 전 베를린에서 만난 전 주한 독일대사 미하일 가이어는 “당시 우리가 단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면 통일은 힘들었다”며 “한국은 시간이 있을 때 전투를 준비하듯 정교한 통일 외교전략을 수립해 놔야 한다”고 충고했다.

정부가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통일 외교전략 수립에 나선 것 같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보여준 서독의 치밀한 외교전략을 충분히 숙고할 필요가 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