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확산되는 ‘설 권리’…‘앉을 권리’는 요원

입력 2015-09-08 02:51

서울 강남구의 한 은행 지점에서 일하는 권모(26·여)씨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대부분 시간을 창구에 앉아서 보낸다. 권씨는 “똑같은 자세로 앉아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며 “허리나 목이 아플 때도 있지만 근무시간 중에 일어서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지점에서는 고객을 대하는 태도를 인사평가에 반영한다. 업무시간에는 잠깐이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기가 쉽지 않다.

서울 중랑구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최모(50·여)씨는 권씨와 정반대 상황이다. 업무시간의 대부분을 서서 보낸다.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 때까지 쉬는 시간 1시간을 빼고는 앉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최씨는 “손님을 대할 때 서서 맞이하는 게 공손해 보인다는 인식이 뿌리 깊다”며 “의자를 가져다 두고 고객이 없을 때만 사용할까도 생각했지만 관리자 눈치가 보인다”고 토로했다.

이런 근로자들에게 ‘앉을 권리’와 ‘설 권리’는 없다. 앉거나 서는 근무자세가 곧 업무태도, 인사평가로 직결되는 이들은 하루 종일 근무자세를 통제당한다. 두 가지 권리를 따로 보장하는 법 조항도 없다.

특히 ‘앉을 권리’는 강한 통제 아래 놓여 있다. 7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현행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는 ‘지속적으로 서서 일하는 근로자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비치해야 한다’는 대목만 있다. 겨우 ‘앉을 수 있는 권리’의 여지 정도를 남겨둔 것이다.

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진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일하며 앉아 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이성종 정책실장은 “대형마트에서 의자를 준비했지만 등받이도 없는 빈약한 의자가 많고, 계산대가 좁아 한 곳에 모아놓기도 한다”며 “사측에서 앉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관리자 눈치도 보이고 계산대 구조상 앉아서 업무를 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이와 달리 ‘설 권리’는 일부 기업 등에서 ‘선택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 근로자 개인이 서서 일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회사 차원에서 서서 일하기를 권장하기도 한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 본사는 ‘스탠딩 회의’를 자주 갖는다. 서서 회의하면 참석자들이 의자에 기대 늘어지지 않아 빠른 진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회의시간이 길어지면 다리가 아프니 잡담을 거의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만 하게 되는 것이다. 1시간 정도 걸리던 회의가 20분 안팎으로 줄었다.

미디어업계 근로자 정모(27)씨는 지난달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노트북 받침대’를 샀다. 하루에 10시간 넘게 컴퓨터로 일하는데 노트북 화면이 눈높이보다 낮은 탓에 앉아서 일하면 목과 허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정씨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 8명 중 3명이 이미 비슷한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온라인쇼핑몰 11번가에 따르면 스탠딩 데스크나 기존 책상에 올려둘 수 있는 높이 조절용 노트북 받침대의 올해 상반기(1∼3월) 판매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305%로 급증했다. 정씨는 “외신을 보면 직장인이 하루 업무시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4시간가량을 서서 일하면 심장마비나 암 등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더라”고 말했다.

그나마 ‘설 권리’가 보장받는 것은 ‘앉을 권리’를 원하는 근로자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무직·정규직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앉거나 서는 것을 선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