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상무’ 영광은 잠시, 실적 압박·파벌 다툼에 고민 세상 등진 40대 임원… 법원 “산재 인정”

입력 2015-09-07 03:30

2012년 8월 출근한다며 집을 나선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겨우 46세였다. 카이스트를 나와 대기업에서 최연소 상무가 된 남편이었다. 두 아이의 아빠인 데다 별다른 빚도, 건강 문제도 없었다.

남편은 한 달쯤 전부터 아내에게 수차례 “사표를 내고 싶다”고 말했다. 모아둔 재산은 얼마나 있는지,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드는지도 물었다. 하루는 출근 전 깊은 한숨을 쉬며 “많이 힘들다. 안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전 아내가 아닌 처남에게 문자메시지로 유언을 남겼다. “아이들과 누나를 부탁한다.”

A씨는 카이스트 졸업 직후인 1989년 LG 인터넷·통신 계열사에 입사했다가 2004년 LG파워콤으로 이직했다. 2010년 LG텔레콤이 LG파워콤을 흡수해 LG유플러스를 출범시키면서 그는 상무로 발탁됐다. 남보다 4∼5년 빠른 승진이었다.

생소한 분야인 IPTV 사업부장을 맡아 하루 13∼15시간을 근무했고, 주말에도 골프 접대를 하거나 회사로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IPTV 분야는 경쟁 업체에 밀려 2010년 이래 계속 영업손실이 발생했다. 2012년 ‘실적 두 배 증가운동’을 펼쳤지만 목표에 크게 못 미쳤다. 매출 부진의 책임은 그에게 집중됐다.

새로 취임한 본부장과의 마찰도 A씨를 압박했다. 본부장은 회사 내 세력이 큰 LG텔레콤 출신이었다. 업무처리 방식을 놓고 그와 충돌하거나 그를 배제하고 팀장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A씨는 사내 파벌 다툼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4월 방송통신위원회가 주는 동탑산업훈장 수훈자로 A씨가 선정되자 그의 직장생활은 더욱 위축됐다.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고 회의에서도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부하 직원들에게는 ‘사는 게 재미있느냐’ ‘스트레스 받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등의 질문을 던졌다. 사내 이메일로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사장단 업무보고가 있던 날 아침 목숨을 끊었다.

A씨 아내는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를 신청했다가 거부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부장판사 김병수)는 1년이 넘는 심리 끝에 원고승소 판결했다고 6일 밝혔다. 재판부는 “A씨가 직장에서 받게 된 업무상 스트레스를 제외하고 자살을 선택할 만한 동기나 계기가 될 만한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지호일 기자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