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北보다 무서운 빚

입력 2015-09-07 02:30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등 군사적 긴장 상황에서 시작된 남북 고위급 접촉이 극적으로 타결된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은 ‘2분기 가계신용’을 발표했다. 대출과 카드 사용액 등을 합한 가계부채가 1130조5000억원으로 사상 처음 1100조원을 돌파했다는 내용이다. 남북 대화의 성공적 결과에 온 국민이 환호하는 사이 천문학적 숫자의 가계부채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발표 때마다 매번 사상 최대치 아니었느냐”는 시큰둥한 반응이 주변에 많았다. 이처럼 부채 리스크는 북한 리스크에 비해 국민의 체감 위기도가 떨어진다.

국민이 가계부채 문제에 둔감하게 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경제팀의 영향도 작지 않다. 우선 대통령이 가계부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별로 없다. 지난달 6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우리의 딸과 아들, 국가 미래를 위해 결단할 때”라며 노동개혁을 주요 의제로 꺼냈지만 딸, 아들의 미래에 직결될 가계부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올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정의당은 “‘경제’만 42번 반복하면서 가계부채는 언급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그나마 지난해 2월 대국민 담화에서 “2017년까지 가계부채의 실질적 축소를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부채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줄어들었고 그해 7월 최경환 경제팀 출범 후 경제정책은 “빚내서라도 내수를 살리자”는 기조로 변했다. 최 경제부총리가 취임한 지 1년 만에 가계부채는 100조원 가까이 급증했다. 대통령이 담화를 안 하느니만 못한 격이 됐다. 지난 7월 가계부채 관리 방안이 발표됐으나 차질 없이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의 규제완화에서 보듯 그동안의 정부 부채 대응은 경기 상황에 따라 쉽게 흔들려 왔다.

그러나 가계부채는 더 이상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규모나 가파른 증가 속도는 임계점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다. 국민이 경각심을 갖고 있는 대북 리스크와 비교해도 가계부채의 현실은 지극히 우려스럽다. 지난해 11월 금융위원회는 통일 시 북한 개발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약 5000억 달러(현 환율로 약 580조원)로 추정했다. 산술적으로 보면 현 가계부채를 절반가량 줄이면 통일비용을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형적인 안보비용인 국방비는 2008∼2014년 7년간 34% 증가한 반면, 이 기간 가계부채 증가율은 50%에 달했다. 지난해 6월 말부터 불과 1년 새 늘어난 가계부채(94조6000억원)는 지난해 국방비 전체 예산(35조7000억원)의 2.65배다.

더구나 9월 이후 예고된 미국의 금리인상은 가계부채의 폭발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보고서에서 연내 미 금리인상 시 국내 금리도 오르면서 가계의 순이자 부담은 6조2000억원에서 9조원으로 2조8000억원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미국의 아티프 미안과 아미르 수피 교수는 저서 ‘빚으로 지은 집’에서 “국제 사례를 종합해 보면 경제적 재앙에는 거의 언제나 가계부채의 급격한 증가라는 현상이 선행해 일어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과연 그 같은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남북 접촉 타결로 지지율이 급등한 박 대통령의 경제를 향한 눈길은 여전히 노동개혁과 규제완화에만 머물러 있다. 빚폭탄의 뇌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어떤 경기 활성화 대책도 무의미하다는 발상의 전환이 시급하다. 빚은 북한보다 무섭다.

고세욱 경제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