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6월 헤론이 내한할 당시 조선 정부는 신문 발간, 기선 항로 허락, 전신과 우편국 개설 등 외국과 연결되는 언론 통신 교통 분야부터 근대화 사업을 진행하고 이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시작했다. 한편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이 한반도에서 경쟁하는 형국이었다. 제국들의 군인 외교관 상인이 군함과 깃발과 상품을 가지고 진출해 금과 호피를 들고 나갈 때 하나님의 왕국 대사인 선교사들은 청진기와 연필, 성경을 들고 기독교 문명과 복음을 주기 위해 도래하고 있었다.
조선의 개항과 불안한 정세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격화된 청·일의 경쟁과 연계된 국내 보수와 진보 세력의 대결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처음 충돌했고 그 결과 서울에 청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를 타개하려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근대 우편제도의 연기뿐만 아니라 일본 세력의 약화와 중국의 보호 정치를 초래했다.
한편 부산 개항에 이어 1883년 원산과 제물포가 개항되면서 일본 경제의 침투가 빠르게 증가했다. 미쓰비시기선회사가 나가사키에서 3개 항에 기선을 운행하고, 중국의 저다인메디슨회사가 상하이-나가사키-부산-제물포 항로에 기선을 취항했다. 이 기선 항로로 1884년 9월 알렌 의사가 내한했다. 1883년 11월에 네덜란드의 대북부전보회사가 부산-대마도-나가사키의 전신을 독점 개설하면서 조선은 일본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었다. 헤론은 미쓰비시기선회사의 기선을 타고 요코하마-나가사키-부산-제물포를 거쳐 1885년 6월 21일 일요일 저녁 서울에 도착했다. 주택이 마련될 때까지 알렌 사택에서 임시로 거주했다. 갑신정변 후여서 중국 장군들과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친청 보수 양반 가문들이 득세했고 서해를 통해 중국 기독교 문서가 반입되기 시작했다.
진료와 전도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다
다음은 헤론이 서울 도착 5일 후인 6월 26일, 뉴욕 선교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다. 첫 편지이므로 뒷부분 인사를 제외한 전문을 보자. 의료 선교를 통해 조선 개화와 선교의 문이 열린 상황이므로 전도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보고했다.
“드디어 저는 1년 이상 늘 생각하며 가기를 희망했던 바로 그 집에서 귀하께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이곳은 더 이상 ‘은둔의 나라’가 아닙니다. 수도 중심부에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고통을 덜어주는 서양 의학으로 운영되는 병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알렌 의사와 제가 정부 병원(제중원)에서 한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진단하고 처방하고 있다니 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이미 한국인 약제사 한 명을 훈련하여 약을 조제할 수 있습니다). 알렌 의사가 온 시점, 그 얼마 후 사건(갑신정변)의 발생, 중상자(민영익)의 성공적 치료 등은 모두 이 땅에 선교의 문을 열고 확고한 선교의 기초를 놓기 위한 특별한 섭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의 진정한 신분(선교사)을 선포할 수는 없지만 누룩은 천천히 퍼지고 있으며 우리가 이곳 본토어로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면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경청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 정식적인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고, 제 개인 사택으로 이사하지 않았으며 좋은 어학교사를 구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단어와 어구를 배우고 있으므로, 진료하러 오는 자들에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국어 소리를 익히고 있으므로 정식 공부는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학 공부 외에 다른 일이 없는 자만큼 빨리 배우기는 어려운데, 오전 9시에 제중원에 나가서 4시가 되어야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일하는 것을 귀하께서는 원하지 않으시겠지만 필요합니다. 알렌 의사가 병원의 모든 환자를 돌볼 수 없고 왕진도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어학 공부에 최소한 하루 세 시간을 헌신하고 그렇게 지속하기를 희망합니다. 저의 사명이 단순히 저의 의술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의사’를 전하는 것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존귀한 구세주를 말하기를 고대합니다. 외래환자는 벌써 하루 평균 약 60명에 달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도 환자들이 자주 오고 있습니다.”
선교의 첫 단계는 바른 정세 파악, 때를 기다리는 지혜, 주택 마련과 정착, 사업의 기초 확립, 언어 학습이었다. 장로회 선교회는 제중원을 통해 이 준비 과정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전도 수단으로서의 의료 선교
19세기 말 의료 선교는 논에 볍씨를 뿌리기(복음전도) 전에 굳은 땅을 뒤집는 쟁기질에 비유되었고, 교육 선교는 논에 물을 대어 고르고 준비하는 써레질에 비유되었다. 병원-학교-교회 순서로 선교가 진행되면서 문서와 여성 분야가 더해져 ‘펜타곤(오각형)’ 근대 선교가 형성되었다. 즉 영혼 구원을 위한 교회 설립을 위해서 ‘병원’ ‘학교’ ‘출판소’ ‘여성’ 사업의 네 가지 수단을 간접 선교로 이용했다. 의료선교사는 육체의 질병 치료에 멈추지 않고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는 ‘위대한 의사’인 그리스도를 전했다. 위의 편지에서 보듯이 헤론도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환자 진료와 전도에 활용해 나갔다.
그러나 헤론은 의료가 전도의 문을 여는 수단이라는 관점에서 현장 경험 후 점차 의료 자체가 선교라는 관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전에 개신교는 문명 개화와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만족시키면서 반기독교 감정을 해소해나갔다. 이에 감리교 선교사였던 스크랜턴 의사는 헤론이 도착하자 바로 정부 병원인 제중원을 떠나 선교 병원인 시병원(施病院)을 개설해 전도를 겸하려고 했으며, 1889년부터 의료 선교의 필요성이 감소하자 목회 선교로 전환했다.
하지만 헤론은 의료 선교가 왕실과 고관의 호감을 사고, 아직 완전한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정부 병원에서 계속 의료 사업을 시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세 판단과 선교정책의 차이로 인한 노선 분열, 갈등 문제는 나중에 다루겠다.
옥성득 교수(美 UCLA)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3) 내한·정착, 1885년 선교사가 처음 한 일
입력 2015-09-08 00:31 수정 2015-10-26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