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배타적인 모임은 있으며 정회원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서 엄두를 못내는 모임도 있다. 거기에 비하면 교회는 정말 자유로운 모임이다. 그런데 교회가 변하고 있다. 상당히 까다로운 정회원 인준과 함께 배타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가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교인들이 교회를 벗어나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을 제대로 표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우리 교회들의 가장 큰 문제로 이중성을 꼽는다. 교회 안에서는 선하고 교회 밖에서는 악하다. 이 점은 교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체제와 지도자의 문제이다.
교회는 교회 내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성숙된 신앙인지를 가르쳐왔다. 교인이라면 주일성수를 해야 하고 각종 집회에 참석해야 하며 헌금을 잘 내야 한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소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아마 어느 독자는 교회 밖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왜 교회에서 가르치느냐고, 이미 밖에서 다 배운 것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수긍이 가는 반문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관점이 녹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점은 미묘하지만 점차 영향력이 커지면서 결국 교회 안에서만 성실한 기독교인을 양산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서 배운 지식을 교회에서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로는 ‘우선순위’라는 명목으로 이야기된다. 오래전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의 푸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자기는 기독교인 청년을 채용하기 꺼린다는 말이었다. 성실하게 일하지 않으면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면서 일요일 근무는 빠진다는 것이다. 일요일 근무 여부가 핵심이 아니라 성실과 책임이 핵심이다. 어떻게 보면 교회가 예수님의 마태복음(5:23∼24) 가르침을 거꾸로 하여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우선 교회에 와서 헌금을 해라”로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더 예민한 주제가 있는데 교회가 교인들의 신앙적 자발성을 저해하고 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란다. 교회 안 나가고 한 달 이상 지속해서 신앙심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교인이 몇이나 될까? 교회를 안 나가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현실을 보라. 먹고사는 문제로 주일에 교회를 못 가는 사람이 태반이고, 병이나 기타 이유로 교회에 갈 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교회는 교회에 잘 나오는 것만을 지향하기보다 설령 교회에 못 나오는 경우에라도 신앙심을 유지하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교회 출석은 양보할 수 없는 기본 사항으로 취급한다.
우리는 성경과 기도에 있어서만큼은 갓난아이처럼 전적으로 그것 없이는 죽을 존재로 살아가야 하지만 냉정히 교회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성장시키지 않고 의존심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냉정히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것이 다 교회라는 조직을 키우기 위한 것에서 출발한다는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
최의헌<연세로뎀정신과 원장>
[최의헌의 성서 청진기] 건강하지 못한 교회
입력 2015-09-05 0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