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칼럼] 화해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입력 2015-09-05 00:21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것이다.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나 환도뼈가 위골되는 경험을 한 후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 사이에 화해를 선물하셨다. 주목할 것은 야곱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인 형 에서에게 한 고백이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 참된 화해는 사람끼리의 화해가 아니라 그 화해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는 화해이다. 그냥 잘해보자고 악수하는 것은 화해가 아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나타나야 한다.

화해는 실로 어렵다. 진실을 인정하는 용기와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하는 담대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화해란 정의가 함께 실현되는 것이다. 값싼 화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는 정의가 해결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문제 해결이 안 되고 감정이 풀리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화해는 거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사는 엘론이라는 한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어느 날 밤 그는 차를 몰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한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가 차 앞으로 갑자기 뛰어나왔다. 엘론의 차는 아이를 치고 말았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거기는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이었다. 피해자의 가족과 친구들이 당장 잔인한 보복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엘론이라는 그리스도인은 그냥 달아날 수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이미 숨이 끊긴 아이를 안고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거두어 가기를 울면서 기다렸다. 마을 전체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동시에 그들은 유대인 가해자가 멈춰 서서 아이를 안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들은 엘론에게 정해진 날짜에 마을에 와서 이슬람 법정에 서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그 누구도 엘론이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풀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정에 설 날짜가 다가오자 엘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친구들은 하나님께서 풀어준 것이니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법정에 나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을로 돌아가 법정에 섰다. 마을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나타나자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내려진 선고는 살인죄로 인한 유죄가 아니라 죽은 아이의 가정에 가족으로 입양돼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아이 가족들을 방문하고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전쟁의 기운이 맴도는 땅에서 예수님의 가정에 입양된 유대인이 이제 무슬림 가정에도 입양된 것이다. 이 사건 안에서 정의와 용서와 화해가 모두 이루어졌다.

화해의 사건에서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변화를 요구하신다.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기 이전에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키셨듯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하신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서로 화해해야 할 일이 생겼다면 누구에게 먼저 변화를 요구하시는가. 우리에게 화해란 가장 어려운 숙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못하는 것이 화해이다.

어느 대법관 출신 변호사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들끼리의 분쟁이 대법원까지 올라왔는데 그 판결을 맡은 사람이 불교 신자였다고 한다. 불교 신자가 볼 때 서로 화해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는데 대법원까지 올라온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을 불러다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는 절대로 화해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디 한번 끝까지 열심히 싸워봅시다.” 불교 신자인 대법관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순간 두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즉시로 화해했다고 한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 화해가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화해에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때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져 있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일 4:12).

누구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진정한 화해는 서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재훈(온누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