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 눈부신 햇살, 바다 위 데크에 패러 세일링, 제트 스키 등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곳은 하와이. 일본인이 좀 많기는 하지만 피부색과 언어로 미루어 보건대 모인 사람들의 국적은 전 세계를 망라하는 것으로 보인다. 순서를 기다리는 짧은 지루함 속에 들리는 한국말, “하나, 둘, 셋…!” 두 명의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 통로를 막고 바다를 배경으로 열심히 ‘셀카’를 찍고 있다. 금방 산 것이 분명한 화려한 수영복에 얼굴은 대리석처럼 하얗고 매끈하다. 검고 또렷한 눈매에 긴 속눈썹이 시선을 끌고 붉은 입술은 포인트가 된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이탈리아 중부의 요새 도시 오르비에토(Orvieto). 로마에서 피렌체 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평야에 우뚝 솟은 고원 위 도시이다. 기원전 만들어진 동굴 주거지, 흑백의 성당,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 그리고 유럽의 많은 도시가 그렇듯 오래된 돌길과 광장도 그대로 유지돼 있다. 이 아름다운 오르비에토를 누비며 중세 도시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 그런데 A씨는 시간이 갈수록 울상이 되어간다. 오늘도 화사한 원피스와 굽 높은 샌들이 돋보인다. 큰맘 먹고 떠난 유럽 여행이니만큼 매일 다른 패션으로 멋을 내고 싶었다.
중국에 한국 화장품 붐을 일으킬 정도로 한국 여성의 고운 피부와 세련된 화장법은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부추겨 외모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하지만 그런 만큼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못하는 한국 여성들의 짙은 화장과 과도한 옷차림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의아함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액티브한 해양 스포츠에 파운데이션과 속눈썹은 어울리지 않는다. 땀이 뻘뻘 나고 매일 10㎞ 넘게 걷는 여름 유럽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치렁치렁한 액세서리, 높은 신발은 불편할 뿐이다. TPO라는 말이 있다. 때와 장소, 경우에 따라 복장이나 행위, 말씨 등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더운 날씨나 바닷가에 짙은 화장이 안 어울리는 것처럼 세계 곳곳에서 쉽게 마주치는 한국 사람들의 등산복 차림도 개운하지 않을 때가 있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의 미소’ 앞에 등산화와 모자까지 갖춘 색색의 등산복 차림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주변과는 달라보였다. 한 나라의 역사적인 유물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진지하게 감상하는 자리에 등산복 차림은 어울리지 않는다. 등산복은 여행에 좋은 편한 옷이 분명하지만 어디나 입고 갈 수 있는 옷으로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일본의 오래된 료칸이나 프랑스의 고성 호텔 중에는 등산복 차림의 손님은 들어올 수 없다고 얘기하는 곳도 있다.
최근 문화예술 투어가 늘어나면서 공연 관람이나 레스토랑 방문시 복장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혹시라도 예의에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게 될까 우려하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예의를 갖춰야 하는 것은 공연장이나 레스토랑에서만이 아니다. 때와 장소, 경우에 맞춰 준비할 수 있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그렇게까지 해서 여행을 가야 하느냐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으나, 이제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만한 때가 됐다.
서현정 뚜르디메디치여행사 대표
[기고-서현정] 루브르에 간 등산복 관광객들
입력 2015-09-05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