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영화 속 길] 삶, 그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순례의 길… 주님의 길-인간의 길 다룬 작품들

입력 2015-09-05 00:20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라.”(사 55:9) 우리는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리이까?” 우리가 물을 때 하나님은 답을 하신다. 그 답이 기나긴 침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지친다.

내가 서 있는 이 길을 하나님이 기뻐할 수도 있고, 노여워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 위에 있다.

다만 죄 가운데 버려진 인간의 비참함을 직시할 때, 인간을 측은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할 때, 하나님은 길을 보여 주신다.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인 최윤 서강대 교수와 임세은 서울국제사랑영화제 프로그래머에게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을 다룬 작품을 4일 추천받았다. 이 길 위의 문장과 전경들이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안내할 것이다.



인간의 그늘은 그에게 닿는다

‘인생의 노정 중간에 나는 길을 잃고 어느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단테(1265∼1321)의 신곡(神曲) 첫 구절이다. 신곡은 중세 최고의 서사시로 꼽힌다. 단테가 신곡을 쓰기 시작한 나이는 35세였다. 신곡은 위기감과 혼란에 빠진 시인 단테의 영적 순례기이다. 그의 앞에 세 마리 야수가 길을 막아선다. 육욕을 상징하는 표범, 교만을 나타내는 사자, 탐욕스러운 늑대다. 그는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한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순례다.

인간은 평생 동안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La Strada, 1954). 불량한 광대 잠파노는 백치 같은 젤소미나를 조수로 부린다. 서커스단에서 만난 일 마토는 젤소미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잠파노를 사랑하는군요. 그거 알아요? 잠파노도 당신을 사랑하는 걸.” 젤소미나는 놀란다. 잠파노는 평소 젤소미나를 손찌검하고, 그녀 앞에서 다른 여인을 안는 사람이다.

일 마토는 “잠파노는 자기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한다. 젤소미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잠파노는 젤소미나를 한 해변가에 버린다. 세월이 흘러 흰머리가 난 잠파노. 그가 그녀를 버린 길 위에 서 젤소미나의 행적을 듣는다. “잠파노라는 이름만 부르면서 죽더라.” 잠파노는 주저앉아 운다. 임 프로그래머는 “로드무비에서 ‘길’의 이미지는 인생의 여정을 환기시킨다”며 “잠파노는 관객에게 지금 받고 있는 사랑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한다. 길 위에 있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숙명을 구도자적 견지에서 보여주는 영화”라고 평했다.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규장)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고향 ‘멸망의 도시’를 떠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시’에 당도하는 얘기다. C S 루이스의 ‘순례자의 귀향’(홍성사)은 현대판 천로역정이다.

인간 내면의 그늘은 하나님에게 닿는다. 이승우의 소설 ‘생의 이면’(문이당)은 어린 시절 상처로 폐쇄공포증을 가진 이가 하나님에게로 나아감으로써 치유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박부길의 부친은 정신분열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끓고 어머니는 개가를 한다. 신학대에 입학한 그는 학업에도, 사랑에도 실패한다. 하나님을 만난 뒤 늙은 어머니와 재회하고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한다. 실제 서울신학대를 졸업한 이승우는 한 신학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최 교수는 “이승우는 신앙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계속 다뤄왔다. 이 작품은 하나님께로 가는 한 신학도의 길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길에서 생의 의미를 배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099일 동안의 1만2000㎞ 도보여행기록 ‘나는 걷는다’(효형출판). 30여년 경력의 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의식적 자유, 경건한 침묵에 동참할 수 있다. 영화 ‘더웨이’(The Way, 2010·아래 사진)는 아들의 유해를 안고 스페인 산티아고의 길에 선 아버지 톰의 얘기다. 산티아고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누구를 위해 이 길 위에 있는가

우리의 선택이 하나님 뜻에 합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홍성사)은 일본의 기독교 박해가 심했던 1635년이 배경이다. 배교(背敎)한 뒤 사제의 옷을 벗고 일본인으로 산 실존인물이 모티브이다.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 사제 로드리고가 일본에 잠입, 배교한 사제 페레이라와 대면한다.

페레이라는 로드리고에게 고문당하는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 측의 요구대로 성화를 밟으라고 권한다. 그는 결국 성화에 발을 올린다. 그 순간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침묵은 1982년 홍성사가 국내에 초역, 30여년 동안 80쇄를 통해 10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이다.

1750년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노예로 팔려 나가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미션’(Mission, 1986). 가브리엘과 멘도자 신부는 1750년 남아메리카 오지의 원주민 과라니족을 지키기 위해 나선다. 멘도자는 원주민을 위해 무기를 든다. 가브리엘은 멘도자를 질책한다. “무력이 정당하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어질 거요.” 가브리엘은 멘도자의 축복 요청을 거절한다.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거요.” 가브리엘은 십자가를 들고 맨몸으로 총탄 앞에 서고 멘도자는 칼로 침략자들에게 저항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멘도자를 비켜가진 않았을 것이다.

김진무의 ‘신이 보낸 사람’(2014)은 북한 지하교회 교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크리스천의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헤론드 크론크의 ‘신은 죽지 않았다’(2015)는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써내라는 대학 교수를 상대로 한 신입생이 논박하는 과정이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의 에세이집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청림출판)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대해 조언한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그 언덕길에 올랐다. 멜 깁슨이 감독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2004)는 예수 최후의 12시간을 영화로 만들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길에 오른 예수의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졌다. 짐 비숍의 ‘예수 최후의 날’(열화당)은 문장으로 그리스도의 최후를 기록했다. 그의 처참한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이 길 위에 있는가.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 1981)는 1924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금메달리스트 2명의 실화 영화이다. 유대계 영국인 아브라함은 이방인에 대한 멸시를 이기고자 집념의 승부를 벌인다. 에릭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뛰어가도 곤비치 않다”(사 40:31)는 말씀에 의지해 달린다. 에릭은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숨졌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