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최첨단에 서 있을 것 같은 도시, 홍콩에도 과거와 현대가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외부인에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포호(POHO)와 노호(NOHO)다.
포호는 홍콩 섬 할리우드 거리 남쪽의 소호(South of Hollywood Road)처럼 ‘포힝퐁 거리’를 중심으로 펼쳐 있어 포호로 불린다. 예전엔 인쇄소가 모여 있었지만 지금은 과거를 간직한 현대적 장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을 찾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먼저 홍콩 섬의 홍콩역이나 센트럴역에서 내린다. 약 10분간 걸어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800m짜리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왕페이가 량차오웨이를 훔쳐보던 그 장소다. 목적지에 정확히 가려면 추억 속 장면에 지나치게 몰입해선 안 된다. 모두 8개 구간 중 2개 구간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른쪽으로 나가면 좁은 골목길 사이 옛 건물이 늘어선 포호를 만날 수 있다.
한낮의 포호는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언덕길의 낡은 건물들은 근대 이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 준다. 경사진 곳에 건물을 올리기 위해 쌓은 돌담과 곳곳이 파인 시멘트 바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수십년 전에 홍콩인들이 쓰던 그릇과 바구니 등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가 아직도 있다. 동행한 누군가가 가게에서 초록색 플라스틱 편지함을 샀다.
죽은 자를 위한 관을 짜는 가게도 문이 열려 있다. 거리 한 가운데 ‘만모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두 팔을 벌렸다가 다시 모아 기도하는 현지인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표정은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고, 향냄새는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진하다. 만모사원은 1847년 건립된 홍콩의 가장 오래된 도교 사원이다. 예전에는 과거 급제를 바라던 사람들이 문신(文神)과 무신(武神)에게 기도를 올렸다.
노호는 포호에서 북쪽(North)으로 맞닿아 있는 거리다. 붉은색 생고기를 걸어놓고 파는 정육점과 프랑스 레스토랑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고 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포호와 노호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곳으로 변한다. 얼마 전 문을 연 듯한 카페와 식당에 조명이 켜지고 지나가는 사람도 늘어난다. 골목 곳곳의 벽화에 눈길이 가기 시작하는 것도 몸의 그림자가 벽에 닿는 이 즈음이다. 벽화는 거리의 세월을 애써 감추려는 듯 과도하게 알록달록하다. 젊은 예술가들이 도둑질하듯 몰래 그림을 그려놓고 “이제 이곳의 주인은 바로 우리”라고 시위하는 것 같다. 밤이 본격화되면 소규모 갤러리와 디자인 상점의 존재는 더 선명해진다. 과거에서 현재로, 불과 수시간 만에 수십년이 흐른 것 같다.
포호에서 요즘 가장 뜨는 곳은 ‘PMQ’다. 네모반듯한 7층짜리 건물 두 동이 마주 서 있고, 건물에는 교실 절반 크기의 방이 빼곡하다. 각 방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신참 디자이너들이 만든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방에는 목걸이와 귀고리 등 장신구가, 다른 방에는 가방과 구두가, 또 다른 방에는 옷들이 전시돼 있다. 그릇, 주방용품, 책장, 지구본, 금속공예 작품 등 품목을 다 헤아리기 어렵다.
사실 이곳은 1889년 홍콩의 첫 서구식 교육을 위한 학교로 지어져 1951년부터 경찰관이 가족과 함께 거주한 건물이었다. PMQ는 기혼경찰숙소(Police Married Quarter)의 약자다. 2000년 이후부터 10년 이상 텅 비어 있었다. 홍콩 당국은 이곳을 예술센터로 활용하기로 하고 젊은 디자이너들이 상상력을 발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빌려주고 있다.
PMQ 복도를 걸어 다니며 유리창 넘어 각 방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남의 집을 엿보는 것처럼 쏠쏠하다. PMQ에는 디자인 상점이 80여개 있고 개성 넘치는 모양의 빵과 초콜릿, 케이크 등을 파는 가게가 10곳을 넘는다.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든 작품을 ‘득템’(구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포호에서 감수성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면 세계적으로 이름난 갤러리의 홍콩 지점을 찾아가면 된다. 홍콩역 인근 코노트로드 센트럴 50번지에 ‘화이트 큐브’와 ‘갤러리 페로텡’이 있다. 포호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화이트 큐브는 젊은 예술가를 발굴해 명성을 얻은 영국의 유명 갤러리다. 2012년 홍콩에 지점을 열었다. 프랑스 파리의 ‘갤러리 페로텡’도 같은 해 지점을 개설했다.
홍콩은 최근 세계 미술시장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미술품에 관심을 갖는 인구가 늘고 있어서다. 이 도시에선 예술 작품을 거래할 때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세계 3대 아트페어인 스위스의 ‘아트 바젤’은 2013년부터 홍콩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마크 선더슨 아시아 컨템퍼러리 아트쇼 이사는 “올해에만 국제적인 아트 페어가 세 차례 열린다”며 “홍콩의 미술시장은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홍콩의 갤러리는 110개에 이른다. 센트럴역의 페더빌딩에도 가고시안, 펄램, 사이먼 리, 리먼 머핀 등 유명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의 폭발적 증가는 여행객에게 축복이다. 굳이 미술작품을 사지 않더라도 눈이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화이트 큐브와 갤러리 페로탱 모두 입장료 없이 관람할 수 있다. 피크 트램을 타고 올라 보는 야경과 ‘심포니 오브 라이트’(도심 불빛 쇼)가 더 이상 새롭지 않은 여행객에게 홍콩의 갤러리는 새로운 안식처가 될 수 있다.
홍콩=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