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 강원도 평창군 봉평에 가면

입력 2015-09-03 02:32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조성된 메밀밭에 교교한 달빛이 쏟아지자 함초롬히 피어난 하얀 메밀꽃들이 소금을 뿌린 듯 눈이 부시도록 하얀 융단을 펼쳐내고 있다. 꽃밭 사이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사랑과 웰빙, 문학을 만날 수 있다.
평창읍 평창강 둔치에 조성된 백일홍 꽃밭.
‘이효석 문학의 숲’에 조성된 소설 속 무대 물레방앗간.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효석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가을의 들머리인 9월은 소설 제목 그대로 ‘메밀꽃 필 무렵’이다. 소설의 배경인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들어서면 산허리에선 하얀 꽃들이 다투듯 함초롬히 피어나 눈이 부시도록 하얀 융단을 펼쳐낸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도 연상된다. 달빛 교교한 밤이면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7월 초에 심은 메밀은 햇볕 따가운 여름의 기운을 한껏 받아들인 뒤 9월이 되면 때아닌 함박눈처럼 들녘을 온통 은빛으로 수놓는다. 순수토종식물이라는 점에서 우리 전통정서에 잘 어울린다.

메밀꽃과 더불어 인구 5000명가량의 봉평도 피어난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1907∼1942)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자 1999년부터 해마다 이맘때 평창효석문화제가 열려서다. 특정 문인의 이름을 딴 축제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소설은 한미한 시골인 봉평을 국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명소로 이미지를 굳혀놓았다.

올해는 17회째로 오는 4일부터 14일까지 열흘 간 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메밀꽃은 연인&사랑’이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작품 속 주인공인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와 메밀꽃의 꽃말인 ‘연인’에서 따왔다.

방문객이 소설 속의 정서를 더욱 감명 깊게 가슴에 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꾸며진다. 3개의 큰 마당(전통마당, 문학마당, 자연마당)으로 구성된다.

전통마당에서는 시골장터와 농특산물 판매로 장터분위기를 조성해 민속놀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마당이 펼쳐진다. 다양한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이효석문학관을 중심으로 문학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문학마당은 생가, 푸른집 체험행사뿐 아니라 문학길에서 다양한 체험행사를 즐길 수 있다.

효석문화제의 압권은 메밀꽃밭. 올해도 100만㎡ 넘는 메밀꽃밭이 마련됐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꽃밭 사이로 거미줄처럼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다.

소설 속 메밀꽃밭에서의 감동을 할 수 있는 자연마당에서는 나귀를 타고 메밀꽃밭을 걸어보는 이색 체험이 가능하다. 메밀꽃밭에 앉아 책을 읽어도 좋고, 그리운 이에게 엽서 한 장 써보는 것도 좋겠다.

이효석 생가터 주변은 메밀꽃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메밀꽃 포토존을 이용할 수 있고, 꽃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거닐며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감상할 수 있다.

축제장 곳곳에서 열리는 버스킹(길거리 공연), 소설 속 명장면을 재연하는 거리상황극 등도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이효석 문학의 감동과 자연 속의 아름다운 메밀꽃은 물론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봉평에서 나고 자란 이효석은 고향의 정서를 서정시 같은 문체로 뭉클하게 풀어냈다. 문학의 문외한이라도 ‘이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은 곧바로 연결지어 떠올릴 정도다.

‘이효석 문학의 숲’ 입구에는 메밀꽃밭이 은하수를 펼쳐놓은 듯 장쾌하게 펼쳐져 있다. 가난한 드팀전(옷감 가게) 장돌뱅이이자 얼금뱅이인 데다 왼손잡이이기까지 했던 허생원이 20년 세월을 함께한 당나귀와 함께 걷었을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아직 피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꽃뭉치가 빈약하고 붉어야 할 줄기는 초록색을 띠고 있고 있는 곳도 없지 않다. 하지만 축제 기간에는 소담스런 재잘거림으로 피어날 것이다.

문학의 숲에 들어서면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길 옆 돌에 새겨진 소설 내용을 읽노라면 허생원과 동이, 조선달이 직접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 무대를 복원해 놓은 충주집에 다다르면 충주집과 수작하던 동이를 후려친 허생원의 한숨소리, 늙은 나귀를 괴롭히던 장터 아이들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물레방앗간에서는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무섭고도 기막힌’ 하룻밤이 떠오른다.

달이 훤하게 비치는 메밀밭에 서면 봉평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팔십리 밤길에서 허생원이 소금꽃이 내린 것처럼 밝고 흰 밭길을 걸으며 조선달과 동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살아난다.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 가는 일색이었지….’

이어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으며, 의붓아버지와 살다 집을 나와 장돌뱅이가 됐다’는 동이의 이야기도 들린다. 허생원이 동이 엄마가 지금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발길을 돌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뒷얘기는 ‘메밀꽃 필 무렵’을 읽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여러 갈래로 전개되고 결말지어질 것이다. 허생원이 물레방앗간에서 운명적인 인연을 맺은 성서방네 처녀를 메밀꽃 질 무렵 다시 만나 봉평 어디선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만 같다.

메밀꽃을 주제로 한 봉평 여행은 낮에 도착하도록 일정을 잡는 게 좋다. 봉평 주변의 매화마을, 휘닉스파크, 무이예술관 등을 둘러보고 저물녘 봉평으로 들어가 효석문화마을, 이효석문학관 등을 자세히 살핀 뒤 어둠이 내리면 꽃밭을 걷는 것이 봉평메밀꽃밭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평창읍 응암리에 위치한 매화마을 녹색길은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평창강과 기암절벽, 우뚝 솟은 산세, 그리고 소나무 숲이 아름다운 길이다. 약 4.1㎞이며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여울목길과 강변길은 평창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주변 산세를 감상하며 걷는 길이다. 한 폭의 산수화나 다름없다. 휘닉스파크 웰니스길은 2012년 8월 문을 연 건강한 숲길이다. 약 2시간 동안 숲치유사와 함께 숲에 대해 배우고, 체험할 수 있다.

봉평에서는 사랑과 웰빙, 문학을 만날 수 있다. 메밀꽃 필 무렵 하얀 가을에 소설 속으로 걸어보자. ‘웃음꽃’이 흐드러진다.

평창=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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