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암호처럼 들리지만 9988이라는 말이 있다.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고 고용의 88%가 중소기업에 의해 이뤄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민경제에서 중소기업의 위상과 중요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중소기업이 혁신과 고용의 견인차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세계 각국이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시장을 통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성장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빈발하므로 각국은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 정책이 잘못 설계·운영돼 혈세 낭비를 초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소기업의 경쟁력 제고에 방해가 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괜한 시비가 아니라 경청할 만한 내용이 담긴 주장이라고 판단된다.
먼저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의 금융 지원은 2013년 80조원을 넘어 국내총생산의 5.6%에 달했는데 일본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규모다. 나라마다 경제 구조와 금융시장 환경이 다르므로 단순히 외국에 비해 정책자금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만으로 문제를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 이상 지나치게 큰 금융 지원 규모가 분명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중소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온전히 경제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너무나 많이 보아온 다수 국민의 눈에는 중소기업이 부지불식간에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지원은 당연시되고 문제 제기는 금기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중소기업은 항시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호소해 정부 지원을 얻어내려 하는 유인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수요자의 불만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우 지원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필요한 곳에 필요한 정도의 금융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정책 지원이 특별히 필요한 부문이 존재할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단지 중소기업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부의 지원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창업 후 상당히 오랜 기간이 경과하여 자체적인 자금 조달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되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도 유리한 조건이 부여된 금융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신보나 기보 등 대표적인 금융 지원 기관의 고객 중 업력 10년이 넘는 기업의 비중이 30%를 넘는다는 점이 그 증거다. 이는 일정한 능력을 획득한 중소기업이 더 이상 정부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시장에서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금융 지원이 백화점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모태펀드, 중진공, 신보, 기보, 산업은행 등의 정책금융기관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출자, 직접대출, 간접대출, 신용보증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경쟁적으로 자금을 공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민간 시장에서는 경쟁이 아름다운 것이며, 권장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만 복수의 정책기관이 사실상 동일한 고객을 대상으로 뚜렷이 차별화되지 않는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은 분명 낭비일 뿐이다. 금융 지원 수단을 과감하게 단순화하고 정책금융기관 간 명확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박창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경제시평-박창균] 중소기업 금융지원 정책 유감
입력 2015-09-02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