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70년 아베 담화는 무지개 빛깔로 표출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층위의 정치 행위자들의 대립적인 역사인식을 동시에 반영시키려다 보니 상호모순되는 기술로 얼룩져 있다. 아베 담화에 대한 한국 여론은 격앙된 반응을 보였고 세계 여론은 대체로 비판적이었지만 미국 정부는 신속하게 환영의 의사를 표명했다. 미국 정부의 일본 편향적 태도에 한국 여론은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과거 정부의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입장이 담겨 있고 식민지배, 침략, 사죄, 반성 등 4가지 키워드가 포함돼 있는 만큼 용인은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냉전 이후 일본에 관대했던 미국 정부는 역사인식 문제에 애초부터 큰 관심이 없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형성된 ‘신냉전’을 견제하려는 미국 정부는 아베 담화에서 반성의 기미만 보여도 용서해주려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있던 차에, 여러 색깔로 반성의 단어들을 포함시킨 성의에 환영의 두 팔을 벌리기에 충분하였을 터다. 미 정부에 최고 중요 관심사는 일본의 역사 진실의 고백이 아닌 동북아 지역에서의 안보적 실리에 대한 계산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인식의 문제이지만 안보는 생사의 문제인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베 정부는 급변하는 동북아 국제정치 속에 미국의 안보적 이해관계를 교묘히 이용하고, 가장 사죄해야 할 이웃 국가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비난을 피해가는 두루뭉술한 사과 표명에 그치고, 역사 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서구국가들에는 과도한 감사와 고마움을 표해 호감을 유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아베 담화는 전쟁에 의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서는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면서도 식민지배가 초래한 고통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중국이 겪은 고통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그러한 내용을 거의 담고 있지 않다. 이는 역사 문제에서 중국과 한국에 대한 분리 대응을 시사하며 한·일 관계를 미·중·일 관계의 하위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한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가 식민지배에 대한 시각이다. “러일전쟁이 식민지지배 하에 있던 아시아·아프리카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주장은 일본 우익들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일본 내에서도 야당의 격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식민지지배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 중 특히 간 나오토 담화에서 밝힌 “정치·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라는 반성의 표명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2015년 공표한 ‘일본역사가를 지지하는 성명’에서 “올해는 일본 정부가 언어와 행동에서 과거 식민지배와 전시에서의 침략 문제에 정면대응해 그 지도력을 보여줄 수 있는 적절한 기회”라고 발표했다. 아베 담화는 전시에서의 침략 문제에 대해서는 정면대응에서 최소한 차선의 선택을 했지만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한국을 외면했다.
아베 담화에 이어 다음날 발표된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아베 담화의 내용에 아쉬움이 적지 않다고 원론적으로 지적하는 데 그쳤을 뿐 강한 비판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오히려 식민지배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점을 주목한다는 말로 비껴갔다. 국익에 기초한 고전적 외교 행태가 급물살을 타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외교 지형에 직면하고 고뇌하는 정부의 고민이 민낯으로 드러났다. 한·일 역사문제를 양국 간 문제를 넘어 세계 속의 문제로 접근하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할 때가 되었다.
이명찬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한반도포커스-이명찬] 역사인식의 지평 넓혀가야 할 때
입력 2015-08-31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