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통일희년은 꿈꾸는 이들의 것

입력 2015-08-31 00:47

‘우리는 모두 외국인일 뿐, 단 한 번도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지만’ ‘피점령지구 DDR(구 동독)’ ‘우리는 2등 국민’ ‘배신자 콜(당시 총리)을 죽여라’ ‘타도 CDU(기독민주연합)’ ….

독일 통일 직후인 1992년 1월 자료 수집차 방문했던 작센주(州) 수도 드레스덴을 비롯한 구 동독지역 곳곳의 공공건물 벽에 넘쳐나던 낙서들이다. 독일 통일을 부럽게 지켜봤던지라 현장에서 만난 동독인들의 불만은 사뭇 의외였다.

스스로를 외국인, 2등 국민, 피점령지 백성으로 비하하기도 하고 장밋빛 전망을 편 콜 총리, 집권당 CDU 등에 대한 분노도 엿보인다. 통일을 기뻐하면서도 미흡한 정부 지원, 위기적 경제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심각했다. 그것은 분명한 울분이고 현실이었다.

한국 교계가 88년, 한반도 분단 50년째인 95년을 ‘통일희년’으로 선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현장의 소리는 각별했다. 희년(禧年·jubilee)은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그 이듬해, 즉 50년째 되는 해인데 그 때가 되면 땅을 빼앗긴 사람은 땅을 돌려받고, 노예가 된 이들은 해방된다(레위기 25:8∼34).

한마디로 요약하면 희년은 해방과 복권을 뜻하는 ‘기쁨의 해’다. 동독 주민들이 아픔도 바로 그것이었다. 통일은 이뤘지만 해방과 복권은 없었다는 불만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 교계가 주장한 통일희년도 50년마다 돌아오는 숫자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일회적으로 흐르고 말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해방과 복권의 의미도 곧 잊혀졌다.

최근 꽉 막혔던 남북관계에 변화가 일고 있다. 시작은 북한의 도발에서 비롯됐지만 우여곡절 끝에 반전된 대화 국면은 꽤 희망적이다. 다만 기대가 실망으로, 희망이 분노로 다시 주저앉는 것은 아닐지 내심 불안하다. 그간의 남북 교류가 좌절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상황을 기대와 흥분에 내맡길 것인지, 또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란 냉소적인 촉각을 앞세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미래를 준비하느냐에 있다. 그동안 우리의 준비는 희망이 보일 때만 겨우 거론됐을 뿐 상황이 바뀌면 제안들은 곧바로 잊혀졌다. 과거 통일희년 선포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의 준비 또한 꾸준하지 못했던 탓이다.

여기저기서 통일기금을 모으자는 움직임이 확산되는 모양이나 기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일희년의 꿈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는 일이다. 통일 독일에서 보는 것처럼 통일을 비용으로만 인식한다면 받는 쪽은 미흡해서, 주는 쪽은 부담 탓에 각각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올해 통일 25주년을 맞은 독일은 그동안 통일비용으로 약 2조 유로(약 2660조원) 이상을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동독지역의 생활수준은 서독의 70%에 그친다. 반면 서독지역에서 통일비용으로 부담하고 있는 연대세(소득·법인세의 5.5%)는 91년부터 1년간만 운용됐다가 95년 재도입됐는데 현재 서독 주민의 85%가 폐지를 원한다. 동독 지역은 그들대로 불만이 쌓여 신흥 극우파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1인당 GDP 격차가 3배 정도였던 동·서독의 통합에서도 이처럼 불만이 불거지고 있는 마당이니 남북의 현실을 감안할 때 부정적인 전망이 커지기 쉽다. 남북 간 1인당 소득 격차는 이미 40배 이상으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통일희년의 의미가 더욱 절실해지는 이유다.

통일희년의 꿈,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해방과 복권이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는 꿈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때다. 여기에 한국 교계가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통일희년기금도 마련하면서 더불어 배우고 궁리하며 평화의 한반도를 그려봤으면 좋겠다. 꿈은 꿈꾸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