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주산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어머니의 강권 때문이었다. “놓기를∼, 78원이요, 56원이요, 43원이요, 94원이요, 18원이면?” 낭랑하게 숫자를 읊어대는 학원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의 저편에서 흐릿하게 다가온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놓기를’은 ‘(셈을) 놓다’에서 나온 준비 구령이었다. 당시에는 주판알을 잘 튕기면 영재로 인정받았다. 그런 대접 받기를 희망하면서 너도나도 학원 문을 두드렸으리라. 간혹 TV에 주판을 가지고 속성으로 복잡한 숫자 조합을 계산해내는 ‘주산 달인’을 보면 그렇게 부럽고 신기할 수가 없었다. 아련한 추억이다.
30∼40년 전엔 주판 한둘 없는 집이 없었다. 아날로그 시대에 훌륭한 계산기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주판은 상고(商高)를 상징하기도 했다. 상고생들은 책가방 옆구리에 주판을 끼고 다녔다. 주산 관련 자격증은 그들에게는 필수였다. 최상위 급수 자격증이 없으면 은행이나 회사 경리 자리에 취업하기 힘들었다. 1970∼80년대초 전성기를 누렸던 주판은 전자계산기와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퇴물 취급을 받게 된다. 주산은 90년대 중반 상고의 정규과목에서 빠졌고, 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던 급수시험도 2001년 사라졌다. 주산 학원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디지털의 파상 공세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렇게 운명을 다한 것처럼 보였던 주산이 최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게임 중독에 대한 반사 이익이라고나 할까. 집중력과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주산 열풍이 전국에 불고 있는 것이다. 주판을 구할 수 없어 일본에서 공수해 올 정도라고 한다. 학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다시 생겨난 자격증 시험에 수많은 응시생들이 몰리고 있다.
주산은 2013년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도 선정됐다. 아이들이 주판(籌板)으로 셈을 하는 주산(珠算·지금은 수판셈으로 많이 불림)을 배우면 수학적 연산 능력 외에 주의력이나 집중력도 높아진다는 순천향의대·가천의대 공동팀의 연구결과도 28일 나왔다.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의 반란’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
[한마당-김준동] 주산<珠算>의 추억
입력 2015-08-29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