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성윤] 남북 ‘8·25 합의’ 이후

입력 2015-08-29 00:20

남북이 지난 25일 서울과 평양에서 합의문을 발표함으로써 43시간의 마라톤협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력시위와 특유의 기세 싸움이 있었으나 양측이 인내심을 갖고 협상에 임한 결과다. 북한의 절박함도 읽을 수 있었다.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문에는 지난 20일 발생한 서부전선 지뢰 도발에 대한 사과와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 주요 내용을 담았다. 상황에 따라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가능성을 열어두고, 향후 당국자 회담을 열기로 한 것 역시 성과다.

이제 김정은은 진정성이란 시험대에 올라선 모양새다. 대화의 상대로서 신뢰를 쌓아야 할 책임은 그에게 있다. 국제적 의무를 갖는 조약조차 구실을 만들어 손바닥 뒤집듯 했던 북한이라 미덥지가 않다. 면피성 사과나 하고 실리나 챙겨온 것이 70년이다. 그러니 이번 합의문에도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옛 버릇이 재발할 것이란 의심 때문이다. “또 당하는 거 아냐?”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돈다. 이제 공은 김정은에게 넘어갔다. 진정성과 신뢰 증진을 위한 성의 있는 후속 조치들 중 상당 부분이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8·25합의가 남긴 시사점은 무엇일까. 우선 독재자에게는 말이 아니라 일관된 원칙의 고수와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능력만이 효과를 담보한다는 사실이다. 전선 지휘관들에게 ‘선조치, 후보고’하라는 군 통수권자의 결연한 의지 표명에 이은 한·미 연합전력의 무력시위에 결국 김정은이 굴복한 것 아닌가.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때 김일성이 다급하게 사과문을 국제연합군 측에 전달한 것도 미 태평양함대의 무력시위에 굴복한 결과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김정은이 출구를 찾아야 할 상황이란 점이다. 지지 세력을 일거에 제거해 버리는 정권의 상태가 과연 정상적이겠는가. 공포정치로 정권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핵과 미사일로 위협하나 이를 무력화할 전략과 군사적 수단을 한·미 연합군이 갖고 있음을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이다. 북측이 합의에 나선 것도 출구를 찾겠다는 위기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파괴력을 감안한다면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은 넘치는 양보다. 그런데 북한의 재발방지 약속은 국제법적 효력이 담보되는 것도 아니고 구속력도 없다. 그럼에도 이번 고위급 접촉을 계기로 향후 다방면의 실무접촉이 예상되고, 이를 통해 신뢰가 쌓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공동합의문 첫 항의 ‘남과 북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당국 회담을 평양 또는 서울에서 빠른 시일 안에 개최할 계획’이라는 대목이 주목된다.

미루어 짐작건대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나 5·24조치 해제를 요구했을 것이고, 우리는 이를 뒤로 미룬 느낌이 든다. 평가할 만하다. 금강산 관광 문제는 실무선에서 다룰 수 있으나 5·24조치 해제는 다른 차원의 의제다. 5·24조치는 천안함 폭침 사과를 넘어 국제 공조 하의 제재 조치로 대북 비핵화의 레버리지이기 때문이다. 5·24조치를 거론하기 위해선 협상 테이블에 북한 핵이 올려져야 한다. 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 갈 길도 멀고 국제 공조도 필요하나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할 과업이다. 한반도 긴장 고조 사태를 통해 국민의 지지가 결집됐다고 본다. 정책 당국자들이 담대하고 지혜롭게 난제 해결에 적극 나설 차례다.

고성윤 군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