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선교사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미전도종족, 로힝야족(族)을 만났다. 미국 남침례교단 출신이자 기독교 난민단체인 ㈔피난처 소속 조무사(58) 선교사는 최근 말레이시아와 미얀마 등을 방문해 로힝야족이 처한 실태를 파악했다. 조 선교사에 따르면 로힝야 사람들은 신속한 복음과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 미전도종족에는 교회나 선교사가 한 명도 없으며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조차 없다. 국민일보는 조 선교사의 탐방기를 소개한다.
로힝야 사람들은 누구인가
느닷없이 닥친 불행, 갑자기 고향에서 쫓겨나 바다로 내몰린 사람들. 가까스로 뭍에 도달했지만 다시 바다로 밀어 넣는 이웃 나라 사람들. 몰래 땅을 밟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총을 든 인신매매단. 가혹한 현실을 마주한 이들의 이름은 로힝야. 이들은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따뜻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로힝야족의 정체는 미얀마의 소수민족이며 종교는 이슬람교, 인종은 방글라데시계라는 것이 전부다. 최근 미얀마의 직접적 박해를 받은 이유는 로힝야 청년 3명이 미얀마 여성 한 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면서 이에 분개한 미얀마 정부가 보복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로힝야 역사에는 정치 종교 인종 경제적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로힝야 인권단체인 ‘MERHROM(Myanmar Ethnic Rohingya Human Rights Organization in Malaysia)’ 대표 압둘 가니씨를 만났다. 그에 따르면 최근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난민들은 먼저 도착해 살고 있는 로힝야 사람들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집은 서민아파트 형태로 작은 방 3개에 한화 17만원 정도의 월세를 낸다. 좁은 아파트에서 서너 가정이 같이 살고 있다. 가니씨는 난민들은 식량이 부족해 외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로힝야 단체이자 인터넷 방송 ‘로힝야 비전TV’ 대표인 무함마드 누르씨에 따르면 로힝야족은 950년부터 미얀마 라카인주(州)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했는데 그 이후 서서히 미얀마 시민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박탈당하기 시작했고 1982년부터는 아예 외국인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교과서에서도 로힝야라는 이름을 삭제해 30세 이하 미얀마 청년들은 로힝야라는 말조차 모른다고 했다.
현재 미얀마 출신 해외 난민들은 14만명으로 추산된다. 누르씨는 “지난 30년간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주지 않았다”며 “30세 청년들은 교육 수준이 낮고 지금 교육을 시작한다고 해도 희망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로힝야 난민의 정착지,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유엔과 난민협약을 맺지 않아 로힝야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로힝야 난민들은 20년 전부터 들어와 살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났지만 국적 불명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살아가는 어린이와 청년들이 많은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10만명 이상의 로힝야족이 불법 체류 신분으로 살고 있다. 다행히 지난 6월 말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태국은 향후 1년간 한정적으로 로힝야 입국을 허용키로 했다. 단 1년 안에 고향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제3국으로 떠나든지 해야 한다.
로힝야족에겐 ‘3가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나라가 없고 교육이 없고 미래가 없다. 내가 보기엔 성경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천국이 없다. 로힝야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이슬람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코란을 공부해 종교적으로는 어느 정도 무장돼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선교사들이 돕는 난민학교에 로힝야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국제한국학교 학생 100명 중 로힝야 아이들은 10명 남짓 됐다. 학교에서는 종교교육을 할 수 없어 주로 영어 수학 과학 등을 가르친다. 교과서는 유엔이 공급하는 책이나 자체 선정한 도서를 사용한다. 이 학교의 특징은 수업 중에 복음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힝야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야하손(18), 무하맛 따융(17), 아심(20), 사바이 뚤라(13), 사요노르(15), 유나이크(17), 또힝(22) 등이었다. 이들은 2012년 폭동 발생 40일 만에 말레이시아에 도착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작은 배를 타고 태국으로 탈출, 거기서 다시 말레이시아 국경으로 이동해 밀입국했다고 한다. 그들은 미얀마에서 겪은 악몽 같은 얘기도 털어놨다. 경찰들이 총을 쏘며 위협했고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공부라고 했다. 이들은 한 달에 600링깃(한화 17만원) 정도를 번다. 그중 300링깃은 고향에 보내고 100링깃은 방값, 나머지는 기타 비용으로 쓴다.
로힝야 난민들은 배우지 못한 데다 불법 체류자로 살면서 사고도 많이 일으켜 쿠알라룸푸르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에는 항상 연루돼 있을 정도라는 말이 전해진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사람들도 로힝야족을 싫어한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 산하 난민학교 120여개 중 로힝야 학교는 20개 정도다. 영어와 수학, 과학이 공통과목이며, 교사는 UNHCR 산하 자원봉사 교사로 충당된다. 말레이시아 북부 페낭의 로힝야 학교를 방문했다. 여학생들은 말레이시아 학생들처럼 하얀 히잡을 쓰거나 흰 상의에 푸른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학교는 2012년 기독교인들이 설립했다.
불안한 미얀마 난민 캠프
말레이시아에서 미얀마 수도 양곤까지는 버스와 기차로 이동했다. 무려 50시간이 걸렸다. 양곤에서 난민 캠프가 있는 시트웨까지는 다시 버스로 36시간을 갔다. 버스는 전형적인 시골을 지났다. 서쪽 산맥을 넘자 로힝야의 고향 라카인주가 보였다. 난민캠프(IDP Camp)는 시트웨 외곽에 있었다.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에 적대적이었다. 주민들은 “로힝야는 없다” “화가 나니 로힝가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는 답변만 했다. 한 오토바이 기사는 “원래 자기들 신분대로 방글라데시 무슬림이라고 하면 평화스럽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있지도 않은 로힝야라는 말을 지어내 외국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이곳에서 만난 정보부 소속 부대표 우 소 눈투 쉬웨씨도 “미얀마에 로힝야라는 소수민족은 없다. 그들은 방글라데시 치카공으로부터 영국 통치시대에 온 벵갈리 무슬림”이라며 “그들이 미얀마 사람들을 속였고 이번에 미얀마 여성을 살해했기에 우리가 응징한 것”이라고 했다.
난민캠프는 통제가 심했다. 몇 개의 골목 입구에는 검문소가 설치돼 있어 경찰이 주민들을 감시했다. 검문소는 원래 미얀마인들이 로힝야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막는 역할이었으나 오히려 로힝야 사람들의 이동을 통제하는 목적으로 바뀌었다.
시외 캠프도 분위기가 비슷했다. 더바인 지역의 경우 규모는 크지 않았고 20∼30채의 가옥이 이어져 있었다. 드나드는 길마다 경찰들이 지키고 있었고 가옥은 대나무로 지어진 집들이었다. 캠프에는 총 986가구가 살고 있었고 우물펌프 4개, 화장실 10개, 태양열 집열판 2개, 학교 하나가 있었다. 식량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이 공급하고 있으나 유엔의 자금 압박으로 언제까지 계속 될지는 모른다고 했다.
캠프의 문제는 물과 화장실 그리고 음식과 일거리였다. 집은 낡아도 잘 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물은 수동식 펌프로는 부족해 보였고, 화장실도 1000명 가까운 인구에는 태부족이었다. 그리고 장기 체류를 하려면 직업이 있어야 하는데 유엔 식량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캠프의 미래는 불안했다.
로힝야족은 도움이 필요하다. 한국은 힘에 부칠 정도로 이들을 도와야 한다. 한국인의 정으로 다가가야 한다. 기독교인은 감상적 접근을 피하되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도와야 한다. 로힝야족과 미얀마인 모두를 도와야 한다. 새마을운동이나 직업교육, 농촌개발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기독교 교육을 통해 이슬람교와 불교의 중재 역할도 가능하다. 최근 쿠알라룸푸르와 페낭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 중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나오고 있다. 조용히 섬기는 사역자들의 노력 덕분이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문의: 조무사 선교사 musa5706@gmail.com)
[한인 선교사, 박해받는 이들을 만나다] 나라·교육·미래 없는 ‘3無 민족’ 로힝야를 아십니까
입력 2015-08-29 0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