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유랑하며 어딘가로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몸은 비록 멈춰있더라도 정신은 자유로워 무한의 세계를 떠돈다. 그래서 헤겔은 이 인간정신의 자유로움을 최상의 특권으로 평가했다. 우리의 정신이 몸 안에 갇혀있다면 이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가. 그렇지만 이 자유는 절제와 고난과 도전을 요구할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신의 은총이자 섭리이다.
예술의 진실과 궁극적인 미의 자기실현을 위해 해외로 나가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이런 대표적인 모험가가 아닐까.
그 대표적인 작가로 백남준 김환기 배운성 같은 이들이 떠오른다. 내가 더러 들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도 한인작가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다. 박혜숙(1955∼ )도 그중 한 사람이다. 2008년 그의 화실은 큰 창고를 쓰고 있었고, 농구장만한 크기에 200∼300호짜리의 작품이 세워지고 눕혀져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는 열과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충격적 만남이었다.
그와의 대화에서 해외작가로 활동하는 예술가로서의 좌절과 고독, 아픔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그의 작품이 뜨거운 열망으로 차 있는 만큼이나 그것은 ‘절대적 공허’를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고뇌의 산물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분명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이면서도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누군가의 말처럼 때론 그곳에 있는 것도 이곳에 있는 것도 아닌 혼돈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박혜숙은 미국 생활이 조국이 그에게 줄 수 없는 자유로운 의식과 경험을 갖게 하는 거대한 생활공간임을 안다. 하지만 당당한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늘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서울대 미대 재학 중 ‘꿈의 나라’ 미국을 찾았다. UCLA 미대를 나와 나름의 세계를 일궈가는 작가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쓸쓸함을 떨쳐 버릴 수 없음을 고백한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내 친구, LA에서 활동했던 시인 박영호의 시 ‘서쪽으로 날아가는 새’를 떠올리며 그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짓는다. ‘바람이 가살스럽게 부는 밤/잠 못 이루던 세월이 다시 살아난다./서러워진 몸뚱이를 뒤척이다가/고향 있는 서쪽으로 머리 두르면… 나는 비로소 편히 잠이 든다/몸이야 어디 있든/서쪽에서 떠나온 내 영혼/꿈속에서도 몽유병자로 몸을 나와/고국 있는 서쪽으로만 찾아간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작가에게 선인장의 가시꽃처럼 새로운 에너지와 영감이 되리라 기대한다.
박혜숙은 자기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를 반추하며 이렇게 답한다.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떠도는 영혼이 아니라, 한국도 미국도 잃어버린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한국과 두 나라를 가진 위대한 또 다른 거대한 창조의 나라를 세우는 미래 역사와 문화를 끊임없이 꿈꾸고 실현한다고 다짐한다.”
그의 그림 ‘A Horse’는 이를 증거한다. 힘차게 달리는 비전이고 회상이다. 화사한 꽃들, 이는 바로 소망이자 그리움이며 꿈이다. 그녀가 LA 한국일보에 매월 연재하는 칼럼은 예리한 감성과 빛나는 문장력, 따뜻한 눈길과 찬란한 아픔이 담겨있어 내게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그녀의 기도는 그만큼 절박하다. ‘삶이 절박할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기도를 통해 신을 만난다. 나에게 있어서 신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박혜숙의 글, 2006).’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경희대 명예교수)
[이석우 그림산책] 유랑의 오디세이아, 영원한 그리움
입력 2015-08-29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