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만남-‘행복한 선택…’ 펴낸 박래창 장로] “인생 77년, 최고의 선택은 교회학교 교사 40년”

입력 2015-08-28 00:01
박래창 원로장로가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국민일보에서 옛 제자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 인생은 두려움이 없는 행복한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가장 잘한 선택 한 가지만 들라면 교회학교 교사를 꼽겠습니다. 하하∼”

교회학교 교사라니…. 77세 희수(喜壽)를 맞은 박래창 서울 소망교회 원로장로가 던진 첫 마디는 밋밋했다. 장로 중에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이 있는가 하면, 묵묵하고 꿋꿋하게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이들도 적잖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장, 한국장로신문 사장, 아가페(소망교도소) 이사, 보창상사 대표이사 등을 지낸 박 장로는 후자에 속한다.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국민일보에서 만난 박 장로는 “숨 돌릴 겨를 없이 외길을 달려왔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면서 최근 펴낸 ‘행복한 선택 박래창 장로의 인생이야기’(한알의밀알)를 건넸다.

그의 아버지는 구세군 사관이었는데 6·25한국전쟁 때 빨치산에 희생당했다. 38세였다.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사춘기에 부친마저 잃은 박 장로는 중·고등학교 시절 구두닦이와 당구장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구김살 없이 자랐다. 그가 나온 송도고는 좌옹 윤치호(1865∼1945) 선생이 1906년 북한 개성에 설립한 미션스쿨로 전쟁 통에 인천으로 피난 온 학교였다. 58년에 졸업한 박 장로는 ‘봉사(奉事)’라는 교훈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받들어 섬긴다는 의미로 높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60년대 후반. 제대 후 취직이 안 되자 장사를 하겠다고 생각한 박 장로는 ‘뭐든지 시켜주시면 죽을힘을 다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다. 그런데 생업이 아닌 교회학교 교사직을 주셨다. 묵묵히 순종한 결과는 놀라웠다. 섬유 원단을 개발해 판매하는 회사를 창립하게 됐고 평생의 동반자로 4대째 기독교 집안의 딸을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70년대엔 ‘월남치마’ 원단을 개발해 대박을 터트렸다. 2009년 은퇴하기까지 40년 동안 경영에 여러 차례 고비를 맞았지만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자산입니다. 소망교회 교회학교 부장으로 있을 때였죠. 고3 담당교사가 지금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였어요. 예장합동 출신의 이 목사를 과감하게 영입한 것이지요. 요즘말로 대박이었습니다.”

박 장로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교회학교 부흥에 달렸다고 강조한다. 2007년 한일장신대 채플 시간에 학생들에게 교회학교 교사생활이 바탕이 돼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얘기를 들려준 뒤 정장복 총장에게 도서관 건립기금을 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박 장로는 국제금융 위기가 엄습했지만 약속한대로 2009년 한일장신대 미래도서관 건립기금으로 10억원을 기부했다.

곽선희 소망교회 원로목사와 함께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 건립, 중국과 북한 지역 선교를 주도하기도 했던 박 장로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겼다고 했다. 6년 전 은퇴해 봉사하는 자유인으로 살며 남은 인생이 저녁놀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비쳐지기를 소원하는 그는 자서전을 통해 한국교회 신앙의 후배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

그가 쓴 책에는 교회학교 교사 40년, 장로 28년, 사업가 40년 등 숨 돌릴 겨를 없이 한평생을 살아온 이야기가 숨 가쁘게 펼쳐진다. 소망교회 1대 장로로서 교회의 성장을 몸으로 이끌었던 일, 그리고 2대 김지철 목사로 세대 교체하면서 발생했던 교회 내의 갈등과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 등이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글·사진=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