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지은 굴에서 나른한 저녁을 보내는 오소리 가족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며칠 전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스스럼없이 “날세! 자네 친구”라고 말하는 주인공은 너구리. 올망졸망 새끼들까지 데리고 온 너구리는 “미안하지만 신세 좀 지겠다”며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굴속으로 들어온다.
착한 가장 오소리는 너구리 가족과 별 마찰 없이 좁은 굴에서 사이좋게 지냈는데 어느 날 굴 밖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란다. 굴 밖에 너구리 식구가 눈 똥이 그득한 것 아닌가. 덩치 큰 동물이 냄새를 맡고 쳐들어온다면 큰일 날 상황이라 털이 쭈뼛했지만 우물쭈물 넘어간다. 며칠이 지나도 똥 더미는 그대로다. 너구리가 도토리 몇 알을 내밀면 싫은 내색을 했다가도 또 미안해서 말을 못한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가던 오소리는 결심한다. “돌아올 때까지도 치워놓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내 집에서 나가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 거야!”
그런데 사냥에서 돌아와 보니 냄새를 맡고 온 스라소니가 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오소리가 할 수 있는 건 “얘들아, 나오지 마! 굴 밖에 스라소니가 있어”라고 절규하듯 외치고는 숨이 멎도록 도망치는 일 뿐이었다. 오소리는 그제야 우유부단했던 행동을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오소리는 집짓기에 능한 동물이다. 너구리는 그런 오소리의 집에 들어가 살기도 한다. 생태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결단과 실행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 우화다. 어린이 세계에서도 사소하지만 내일로 미뤄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다. 또한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줄 아는 용기는 어른의 세계에서 더 필요한 일이라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부모가 더 공감할 것 같다.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그림책-아무말도 못하고] 착한 오소리, 너구리 똥 때문에 집을 잃었대요!
입력 2015-08-28 0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