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화해의 길 열다] 北 “유감 표명 어디까지 해야 하나?” 막판 태도 급반전

입력 2015-08-26 03:15

“유감 표명을 한다면 어디까지 해 줘야 하느냐.”

이번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북측 대표단은 우리 대표단이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도발에 대한 사과를 뚝심 있게 요구하자 이처럼 전향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러자 교착상태에 빠졌던 협상의 실마리가 풀렸다. 무박 4일, 43시간 동안 이어진 최장기 마라톤협상 막바지에 이뤄낸 극적인 성과다.

나흘간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는 고도의 수(手)싸움과 기(氣)싸움이 벌어졌다. 양측 모두 서로 지닌 패(牌)를 사실상 다 내보인 채 협상에 임해서다. 박근혜 대통령도 협상 직전 결렬 시 철수를 감수하고서라도 우리 요구를 관철시킬 것을 당부하는 등 단호한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북측이 화전(和戰) 양면전술을 펴고 우리도 이에 맞서느라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남북 모두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내놔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끝까지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냉·온탕 오간 롤러코스터 협상=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과 김양건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은 지난 22일 남측 대표단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문제해결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이들은 우리 대표단에 “(남북관계가) 이 상태로 지속돼서는 안 되지 않느냐. 고위급이 만나서 풀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취지의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북한 권력서열 2위인 황 총정치국장과 대남담당 최고위직인 김 당 비서가 남측 ‘평화의 집’까지 찾아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정부 관계자는 25일 “총정치국장이 남측에 내려왔다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고, 문제 해결의 강한 의지를 방증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 확인한 서로의 간극은 컸다. 북측은 관계개선을 위해 즉각적인 대북방송 중단을 요구했다. 목함지뢰 도발에 대한 우리 측 사과 요구에 대해서도 “그동안 북남관계에서 여러 일이 있었는데 그걸 다 들춰내 서로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뭘 논의할 수 있겠느냐”며 “앞으로 어떻게 잘해 나갈까, 문제를 어떻게 풀까 하는 데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즉답을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측은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고 확고하게 선을 그었다. 목함지뢰 건에 대해 분명하게 정리돼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며 끝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북측은 “우리도 이산가족 상봉을 원한다”며 의제를 돌렸지만, 남측이 “악순환을 반복할 수 없다”고 버티자 협상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회담장에서는 ‘전쟁’ 발언까지 나오는 등 한때 험악한 분위기가 흘렀다고 한다.

◇증거 사진 들이밀며 압박=우리 대표단은 남북관계 악화의 책임이 북측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대표단은 “관계악화의 선후관계를 따져야 한다”며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과거 도발 행태도 일일이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뢰 도발로) 우리 젊은이 2명의 인생이 비틀린 것을 국민은 용납하지 못한다. 도발로 부상이 발생한 것에 대해선 한 명이든 열 명이든 중요한 게 아니다”고 다그쳤다.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향후 재발 시 강력 대응하겠다고 언급하며 “나는 전군을 지휘했던 사람”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북측은 목함지뢰 도발에 대해 “우리가 본 것도 아니고, 그 부분은 잘 모른다”고 회피했고, 남측은 우리 군과 유엔사 합동조사단 결과를 내보이며 책상에 증거사진까지 들이밀었다고 한다. 북측 대표단이 목함지뢰 도발을 ‘과거 일’로 치부하자, 우리 측은 “우리 국민이 다친 걸 그냥 넘어갈 수 있느냐”고 항의했고, 이 과정에서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통일부 당국자는 전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회담에서) 제가 가장 많이 한 얘기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며 “북한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국민들 생각이라고 말하자 북측도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고 전했다.

◇이모저모=나흘간 숨 돌릴 틈 없는 릴레이 협상이 계속되면서 체력전 양상이 전개됐다. 서로의 요구에 답을 줄 수 없을 경우 정회가 반복됐지만 이 시간에도 각각 서울과 평양에 의견을 묻느라 제대로 쉴 여유가 없었다. 북측은 정회가 되면 도·감청 우려로 북측 판문각으로 올라가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대표단은 첫날 만남 이후 장시간 정회되자 서울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지만 북측은 개성 자남산 여관에서 쉰 것으로 전해졌다. 실무진도 회담장 근처 소파에서 쪽잠을 자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북측은 남측에서 제공한 야식과 간식을 나눠 먹었지만 식사는 북측으로 돌아가서 먹었다고 통일부 당국자는 전했다.

전웅빈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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