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들어서면 참 아늑한 느낌이 든다. 왕곡마을을 하늘에서 보면 영락없는 배의 모습이다. 유선형 배가 동해로부터 송지호를 거쳐 마을로 들어섰다. 오음산이라 불리는 5개의 봉우리는 겹치듯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그래서 오봉리다. 방주 모습의 지형은 외기가 틈탈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관통해 왕곡천이 흐르고 이를 중심으로 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상업성마저 느껴지는 다른 유명한 한옥마을들에 비해 이곳은 아직 옛 것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시간이 멈춘 곳 같다. 19세기 전후에 세워진 북방식 전통가옥이 사이좋게 들어서 있고, 소박한 초가집들은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주민들이 직접 거주하며 농사도 짓고 한과를 직접 만들어 팔기도 한다.
마을은 조선건국에 반대한 고려충신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은거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아들 함영근이 이곳에 정착했다. 이후 강릉 최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은 최씨와 함씨의 집성촌이 돼 600년을 이어왔다. 그러다 보니 고성왕곡마을보존회 회장부터 사무국장, 마을 주민까지 서로서로 가족이고 사촌이자 친척이다.
이곳은 여행객들에게 한옥체험이라는 신선한 재미를 더해준다. 체험할 집에 들어서려는데 뭔가 이상하다. 집에 대문이 없다. 제주에서 볼 수 있는 정낭(나무 3개를 돌에 걸쳐 놓은 것)조차도 없다. 개방된 앞쪽과 달리 뒷담은 오히려 높고 폐쇄적이다. 햇볕을 충분히 받고 적설로 인한 고립을 방지하기 위한 것.
집 구조도 흔히 봐 왔던 한옥과 확연히 다르다. 보통 ‘ㄱ’자 모양을 하고 있고, 부엌 앞으로 지붕을 덧대어 헛간으로 쓰고, 외양간이 부엌 안에 있다. 양통집 또는 쌍통집이라고 불린다. 조선시대 함경도(관북지방)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로 겨울에 추위를 견디기에 적합한 겹집 구조이다. 대문이 없어서 휑할 것 같지만 본채 자체는 옷을 겹겹이 싸 입은 것처럼 야무지다. 덧댄 지붕 끝은 눈 높이만큼 낮게 내려와 겨울바람을 요령껏 피하는 모양새이다. 이 밖에도 행랑채며 헛간과 창고가 더 있다.
항아리굴뚝도 특이하다. 집집마다 굴뚝 모양이 다른데 진흙과 기와를 한 켜씩 쌓아올리고 맨 위에 항아리를 엎어놓아 굴뚝을 통해 나온 불길이 초가에 옮겨 붙지 않도록 했다. 항아리 안에서 열기를 집 내부로 다시 들여보내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30여채나 되는 초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가집이 밀집 보존된 곳이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부엌과 마루가 지붕 안에 있다. 남방형 집의 대청마루가 곧 마당으로 이어지는 형태라면, 양통집은 마루가 실내로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겨울에는 아늑하고, 여름에는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다. 사랑방과 안방은 나란히 붙어 있다. 추울수록 가까이 있어야 하니 지붕 안에 밀도 있게 배치한 것이다. 숙박체험 한옥에서는 취사를 할 수 없다. 왕곡마을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오봉식당 등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숙박체험은 온라인 예약시스템(www.wanggok.kr)으로 운영하며, 큰백촌집, 작은백촌집, 성천집, 진부집, 갈벌집 등 8개 가옥을 대상으로 총 26실에서 숙박체험을 할 수 있다. 이용료는 독채로 사용할 경우 성수기와 비성수기에 상관없이 규모에 따라 최소 8만원에서 최대 15만원까지다. 객실별로 일부만 이용할 수도 있다. 지정 한옥 외에 왕곡마을의 민가에서도 한옥 민박을 하고 있다. 한옥 민가 숙박 예약이 매진됐을 경우 왕곡마을보존회(033-632-2120)에 민박을 문의하면 된다.
숙박체험 말고도 소소하게 즐길 거리가 많다. 전통한과 만들기나 두부 만들기는 모두 강원도 땅에서 나는 건강한 먹거리를 이용한 것이다. 월마다 단오부채를 만들어보는 이벤트가 열리며 유두팔찌만들기 같은 절기체험 행사도 있다. 마을 곳곳을 다니며 디딜방아, 고누놀이, 굴렁쇠굴리기, 칠교판, 그네, 널뛰기 등 상설체험에도 참여할 수 있다.
최근 왕곡마을 전통가옥은 수세식화장실과 기름보일러를 갖춘 집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진흙과 기와를 쌓고 그 위에 항아리를 엎어 놓은 굴뚝에서는 여전히 따스한 연기가 올라온다. 나무로 아궁이를 지펴 음식과 난방을 하는 집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왕곡마을은 보존 가치 때문에 외지인에게는 집을 팔 수가 없다. 빈 집들은 정부가 매입해 전통생활체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일반 민속촌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성=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