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국가’ 사는 한국인, 유사시 ‘생존키트’ 알고 있나요

입력 2015-08-26 02:40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김모(55·여)씨는 북한의 포격 도발 이후 전쟁이 날까 내내 가슴을 졸였다. 시장 풍경도 이전과 달랐다. 김씨는 “남북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은행에서 현금 20만원 정도를 찾아 들고 다니는 손님을 많이 봤다. 혹시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나도 미리 은행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쌀과 라면은 집에 조금 있는데 따로 뭘 준비해야 하는지 몰라 답답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부터 닷새간 대피소에서 지낸 경기도 파주·연천 등 접경지역 주민들은 미리 준비해둔 비상물품이 없어 불편을 겪었다. 갑작스러운 대피령에 주민들은 맨몸으로 왔다. 대피소에는 가스레인지나 식기 등 취사도구는 물론 쌀·라면·생수 같은 필수적인 식량조차 없었다. 추위를 막을 담요도 비치돼 있지 않았다. 여름에는 선풍기 등으로 버틸 수 있다지만 한겨울엔 추위에 떨어야 한다. 주민들은 군청에서 나눠준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적십자사의 배식 봉사만 바라봤다. 뒤늦게 비상물품이 공급됐지만 주민은 물론 정부도 우왕좌왕하긴 마찬가지였다.

한발만 내디디면 전쟁이 터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우리 국민은 ‘휴전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고,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은 위기를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생존의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대응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우리는 휴전국가, 분단국가에 살면서 정작 전쟁 등 재난 상황의 행동요령과 ‘생존키트’가 뭔지 깜깜하다.

국민안전처 산하 국가재난정보센터는 홈페이지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의 행동요령과 가정에 비치해야 하는 비상물자 등을 소개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국가재난정보센터에 따르면 전쟁 등 민방위사태가 발생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불필요한 전화를 자제해야 한다. 양초나 손전등을 준비하고 물을 받아놓는 등 단수에 대비하면서 집 안에 머물러야 한다. 국가동원령이 선포되면 동원 대상자들은 평상시에 통보받은 동원영장을 토대로 집결지로 향해야 한다.

비상 상황을 대비한 ‘생존키트’ 목록도 있다. 식량과 취사도구, 침구, 라디오 등은 필수품이다. 쌀 라면 밀가루 통조림 등 식량은 30일분을 준비해야 하고 부탄가스는 15개 이상 확보해야 한다. 휴대용 전등이나 양초, 방독면, 해독제 등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생존키트 목록과 행동요령을 숙지하고 있는 일반인은 찾기 어렵다. 직장인 고모(26·여)씨는 “전쟁이 날 것 같지는 않아서 라면이나 통조림 등을 따로 사지 않았다”며 “대신 뉴스 속보를 보며 혼자 전쟁이 났을 때를 상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고 말했다.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문모(25·여)씨는 “외국에 있다 보니 국내 상황을 잘 몰라 정말 전쟁이 나는 건지 걱정이 됐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비상식량을 챙겨 놓으라고 당부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했다.

왜 이런 정보를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리지 않는 것일까. 국민안전처는 예산 탓을 한다. 안전처 관계자는 “홈페이지나 ‘안전디딤돌’ 같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알리고 있지만 예산이 한정돼 있어 별도의 홍보는 하고 있지 않다”면서 “적극적인 홍보가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어 “민방위훈련 계획에 맞게 국민 행동요령을 검토하고 매년 필요한 내용을 추가하고 있다. 주로 민방위훈련에서 대피요령을 방송하는 방법을 이용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안전처는 평소에 비상시 행동요령을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잠깐 관심을 갖다가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문제라는 것이다. 안전처 관계자는 “항상 관심을 갖고 필요한 정보들을 찾아보면 비상시 행동요령 등에 대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예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박사는 “한국전쟁 때보다 무기가 강력해진 만큼 전쟁이 발발하면 민간인 피해 규모도 훨씬 클 수밖에 없다”며 “훨씬 구체적인 대피훈련 등 실질적으로 민간인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군사편찬연구소가 지난해 발행한 ‘통계로 본 6·25전쟁’을 보면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민간인 인명피해는 270만명에 이르렀다. 피란민 등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은 1000만명이 넘는다.

심희정 김판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