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남북 고위급 접촉이 극적으로 타결된 건 박근혜정부의 ‘원칙주의’ 대북기조가 거둔 첫 성과로 평가된다.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이 신뢰를 쌓는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이 이제야 통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현 정부 출범 후 2년반 동안 지지부진했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본격 시동을 걸 전망이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박 대통령이 2012년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 소개됐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남북관계에서 ‘약속’과 ‘파기’의 악순환이 이어진 원인으로 ‘신뢰’의 부족을 꼽았다. 남북이 신뢰를 쌓아 ‘도발→협상→보상→재도발’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포용노선과 이명박정부의 강경노선을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제시됐다.
원대한 구상과 달리 실제 정책은 시작부터 지지부진했다. 북한이 전혀 호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통일 대박론’에 이어 ‘드레스덴 선언’을 내놓고, 대통령 직속 기구인 통일준비위원회도 발족했지만 북한은 ‘흡수통일론’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인도적 대북지원 및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의 교류협력에 집중했지만 근본적 관계 개선까지는 역부족이었다. 남북 당국 간 대화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구호는 요란했지만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와 함께 “이명박정부의 대북 강경노선과 차별점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도리어 남북관계는 박근혜정부 출범부터 지금까지 악화일로로만 치달았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남북 경제교류의 ‘상징’인 개성공단이 150여일간 폐쇄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듬해인 지난해 2월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린 데 이어 같은 해 10월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등 ‘3인방’이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계기로 깜짝 방남하면서 관계 개선의 기대가 높아졌지만 대북전단 살포 문제가 불거져 다시 냉각기로 접어들었다.
광복 70주년이자 박근혜정부 집권 3년차인 올해가 관계 전환의 ‘골든타임’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많았지만 여전히 남북은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엇박자를 냈다.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원칙에 얽매여 유연성을 잃었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고위급 접촉의 타결은 박근혜정부에는 분명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도발에 강력 대응하면서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한다”는 원칙이 처음 열매를 맺음에 따라 정부를 향한 날선 비판도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집권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힘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그간 대외정책의 발목을 잡았던 북한이라는 ‘뇌관’이 제거되면서 우리의 외교적 입지도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출범 초부터 지금까지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관련 외교정책은 미·중·러·일 등 주변국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었다. 미·일, 중·일 관계개선 움직임에 따라 “한국 외교가 고립됐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제 남북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림에 따라 동북아시아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이니셔티브를 확보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외교 전문가는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교류협력이 활발해지면 주변국에 대한 우리의 외교적 영향력이 높아질 것”이라면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와의 공조 또한 남북관계가 잘 풀릴 때 더욱 긴밀해지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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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8-26 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