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학가는 수많은 이념들이 난무하는 광장이었다. ‘해방신학’이 등장하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주목을 받았다. 세계경제에 중심과 주변이 있고 중심이 주변을 수탈한다는 ‘종속이론’도 목소리를 높였다. 민족경제, 자주자립경제, 중소기업중심경제를 찬양하면서 우리 대기업들은 매판자본이라는 비판도 활발했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한국경제는 미국의 식민지이자 제국과 매판자본의 놀이터였다.
제국에 의한 억압과 수탈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그 수탈의 일선에 이 땅의 기업들이 있다는 주장이 난무했다. 땅을 소유한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엄청난 고리의 경작료를 수취하는 과정에서 이에 앞장서면서 소작인들을 갈취하는 대리인이 ‘마름’이다. 미 제국주의가 ‘지주’라면 한국경제는 ‘소작인’이었고 우리의 대기업들은 ‘마름’ 같은 존재 곧 매판자본으로 치부되었다. 우리가 어렵게 키워낸 멀쩡한 우리 대기업들을 매판자본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자본주의 하에서 후진국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는 주장은 결국 체제 전복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되면서 저항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주장들의 허구성은 상당 부분 증명되고 있다.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수출 주도형 개방형 성장을 추진한 대한민국 경제는 지난 세월 동안 커다란 도약을 이뤄냈다. 이제 우리 경제를 미국의 식민지로 보거나 우리 기업을 매판자본으로 보는 시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주변’국이 ‘중심’국으로 진입한 셈인데 종속이론이 주장하는 수탈이 일어났다면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중소기업 중심 경제발전 모형을 추구한다고 칭송받았던 대만이 지금은 우리나라를 부러워하고 있다. 대만에는 대기업의 브랜드 파워가 부족하다. 자기 브랜드가 없으면 납품과 하청을 통해 영업을 하게 되고 큰 이익을 내기 힘들다. 중소기업 중심 경제가 가진 한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차이완’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 대만경제는 정체되고 중국경제로의 편입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 대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자신의 브랜드로 승부를 걸면서 시장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 자체 브랜드는 곧 힘이요 권력이다. 자체 브랜드를 잘 키울수록 이익의 규모는 커지고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해진다. 우리 대기업들은 글로벌 마켓파워를 키우면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다. ‘한국’ 하면 떠올리는 브랜드 대부분이 우리 기업들 브랜드이고 우리나라를 IT 강국이라 칭찬하는 것도 다 기업들의 브랜드 파워가 가져온 결실이다. 우리 대기업들은 ‘매판자본’이 아니라 ‘국민자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런 주장들과 확실히 결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가만히 있다가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한다고 하면 갑자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대기업들에 문제만 좀 생기면 입에 담기 힘든 언어로 비판부터 해대는 조건반사적 반응도 아직 일부에서 존재한다. 이를 보면 젊은날에 경험한 이념의 세례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개인 구원이 아닌 집단 구원이 중요하다면서 신앙인들을 체제 전복의 도구로 삼으려 했던 해방신학적 주장의 그림자도 아직 우리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다.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회과학 이론은 잘못된 이론이며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이제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 이 땅에서 이런 주장들의 영향이 씻겨나가고 보다 건설적인 국가 발전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를 빌어본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전 금융硏 원장
[경제시평-윤창현] 한국 대기업은 국민자본이었다
입력 2015-08-26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