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오종석] 재벌 총수의 진정성

입력 2015-08-25 00:37 수정 2015-08-25 18:14

“마음 수양을 많이 했더라.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믿음이 깊어졌다. 그는 친절해 보이지 않은 게 흠이었다. 원래 조금 딱딱하고 사탕발림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변했다. 근본이 좋은 사람이지만(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인데), 표정과 제스처까지 좋아졌다. 요즘 행보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하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같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가깝게 지내는 재계 고위인사는 최근 최 회장의 행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14일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최 회장은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오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출소 직후부터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현장을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과거 구속됐다 출소한 보통의 재벌 총수들은 일단 휴식을 취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 현장에 복귀했다. 그런데 최 회장은 수감기간 2년7개월이 무색할 정도다. 마치 며칠간 휴식하면서 재충전한 뒤 나온 사람 같다. 억지 모습이 아니고 스스로 적극적이다. 과거 잘 웃지 않고 근엄해 보였던 얼굴은 온화하고, 가끔 미소도 보인다.

지난 18일 사면 이후 첫 현장경영 방문지로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은 최 회장의 모습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정치인, 정부관료 등 그동안 수천명이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찾아 보여준 ‘생색내기’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최 회장은 오전 10시쯤 도착한 뒤 거의 4시간 동안 듣고, 보고, 토론했다. 사진기자 등 언론이 대거 현장을 떠난 이후 더 성실하고 진지했다. 인큐베이팅을 받고 ‘졸업’을 앞둔 벤처기업 대표들과 도시락 오찬을 곁들이며 90여분간 열띤 토론을 벌였다.

“대기업이 벤처기업 손을 잡아 줘야 한다. 그래야 벤처기업 제품 시장이 생긴다. 시장이 생겨야 생존할 수 있다.”(한 벤처기업인) “시장이 원하고 고객이 원하는 제품, 사업화 모델이 필요하고 시장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시장에서 아니라는 반응이 나오면 내 것을 바꿔야 한다. 내 시장이 딱 있다고 생각하면 너도나도 다 벤처 하죠(일동 웃음).”(최 회장)

마치 편안한 선후배가 만난 것처럼 진지하면서도 유머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최 회장은 이어 LG그룹이 지원하는 충북창조경제혁신센터도 방문했다. 21일에는 현대중공업과 삼성이 지원하는 울산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를 잇달아 찾아갔다. 다른 그룹이 후원하는 혁신센터를 방문한 CEO는 최 회장이 처음이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 센터들의 특장점을 벤치마킹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보자는 취지다.

최 회장은 앞서 청년 일자리 창출계획은 물론 SK하이닉스에 대한 46조원 투자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그는 국가 발전에 공헌한 선배 세대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형편이 어려운 저소득 노인층의 주거복지 향상을 위해 3년간 1000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국민들은 재벌 총수를 잘 믿지 않는다. 그동안 진정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건강하던 사람도 죄를 짓고 구속되면 휠체어에 병원행인 경우가 많았다. 특사로 풀려날 땐 경제활성화 등을 떠벌리지만 구두선에 그쳤다. 비난여론이 확산되면 떡 한 개 내놓듯 사회공헌과 투자를 약속하지만 시늉만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식 때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선서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맹세를 한다는 의미다. 최 회장은 출소 당시 성경책을 들고 이런 말을 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앞으로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의 다짐이 변함없길 기대한다.

오종석 산업부장 js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