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명품 희곡 4편, 국내 무대 데뷔한다

입력 2015-08-24 02:32
연극의 제작과정을 건축에 비교할 때 희곡은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설계도가 나쁘면 아무리 비싼 자재나 첨단 공법을 써도 건물이 부실하듯 희곡이 나쁘면 아무리 뛰어난 배우나 연출가를 써도 좋은 연극이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극단이나 제작사는 늘 좋은 희곡을 찾지만 국내에서 생산되는 희곡은 질과 양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다.

연극계가 외국의 희곡을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9월의 주요 신작들 역시 하나같이 해외 작품들이다. 극단 풍경의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8월 28일∼9월 6일 동숭아트센터), 국립극단의 ‘아버지와 아들’(9월 2∼20일 명동예술극장·위 사진), ㈜쇼앤뉴의 ‘올드 위키드 송’(9월 8일∼11월 22일 DCF 대명문화공장) 그리고 극단 사개탐사의 ‘타바스코’(9월 10∼26일 대학로예술극장)는 영미권에서 각종 희곡상을 수상한 뒤 여러 나라에서 공연된 수작들이다.

러시아계 미국 작가 소피아 로마가 2007년 발표한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초상’은 러시아 혁명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성 시인에 대한 작품이다. 츠베타예바는 현재 러시아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추앙받지만 당시 스탈린 정권의 희생양이 돼 온 가족을 잃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여성 연출가 박정희가 연출을 맡았으며 연극배우 출신으로 요즘 TV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로 자리 잡은 배우 서이숙이 타이틀롤을 맡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러시아 문호 투르게네프의 동명소설을 아일랜드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이 1987년 희곡으로 다시 쓴 것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가 겪고 있던 세대간 갈등과 심리가 체홉 스타일로 그려졌다. 체홉의 4대 장막극 ‘갈매기’ ‘벚꽃동산’ ‘세 자매’ ‘바냐 아저씨’의 인물들을 한 작품에서 만나는 듯하다. 연극 ‘굿모닝 체홉’을 발표하는 등 국내에서 체홉 연출로 정평이 난 이성열이 연출을 맡았으며 오영수·남명렬·윤정섭·이명행 등 유명 연극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미국 극작가 존 마란스가 1995년 발표하자마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음악극 ‘올드 위키드 송’도 주목된다. 괴짜 음악교수 마슈칸과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피아니스트 스티븐이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올 초 한국을 강타한 음악영화 ‘위플래쉬’를 연상시키는 2인극이다. 연극 ‘데스트랩’과 뮤지컬 ‘아가사’로 이름을 알린 신인 연출가 김지호가 연출을 맡았다.

지난해 미국 유진오닐재단이 주최한 창작 희곡 공모전에서 우수 희곡으로 꼽힌 데보라 그레이스 위너의 ‘타바스코’도 국내 무대에 오른다. ‘이단자들’ ‘억울한 여자’ 등 현대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그려낸 여성 연출가 박혜선이 도그쇼 우승견 타바스코의 실종을 소재로 현대인의 좌절감과 탈출 욕망을 풍자적으로 그렸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