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체면)가 없냐. 수갑 차고 다니면서 가오 떨어지는 짓 하지 말자.”
지난 5일 개봉한 영화 ‘베테랑’에서 광역수사대 형사 서도철(황정민 분)은 후배 형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망나니 재벌 2세를 끈질기게 쫓는 열혈 형사의 모습에 23일 현재 850만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다. 덩달아 영화 밖 경찰도 신이 났다. 한 경찰관은 “검사에게 속옷 차림으로 빌던 영화 ‘부당거래’(2010)의 그림자를 5년 만에 벗었다”고 했다.
‘베테랑’과 ‘부당거래’ 사이에서 실제 한국 경찰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경찰 내부에선 “‘부당거래’는 억지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베테랑’ 같은 일이 현장에서 가능하지도 않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대박’ 경찰영화에 열광하는 경찰=지난 20일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수사과 직원들은 단체로 ‘베테랑’을 관람하려다 북한의 포격 도발에 취소했다. 지난 1월 서장이 바뀐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워낙 내용이 좋고 경찰에 시사하는 바가 많아 단체관람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소식을 들은 다른 경찰서 관계자는 “사기 진작 차원에서 우리도 윗선에 단체관람을 건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영화를 후배들과 함께 봤다는 일선 경찰서 과장급 간부는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경찰 모습이 잘 녹아 있어 감동했다”며 “제복을 처음 입었을 때 느꼈던 책임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부당거래’ 때와 전혀 다른 반응이다. 경찰교육원이 지난해 말 전국 경찰관 618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부당거래’는 1137표로 ‘최악의 경찰영화’에 뽑혔다. 내부 실수를 은폐하려 살인도 마다않는 경찰 모습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오락실 업자에게 뒷돈을 받는 ‘투캅스’와 다급한 신고가 들어와도 외면하는 경찰이 등장하는 ‘추격자’ 등이 뒤를 이었다. 서울시내 지구대의 한 경찰은 “실수만 극대화한 연출은 경찰 입장에서 볼 때 참 힘이 빠진다”고 했다.
◇‘베테랑’ 현실서 가능할까=그러나 경찰 내부에서는 ‘베테랑’처럼 재벌 2세에게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실제로 가능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반응도 많다. 정치권이나 재벌이 경찰 수사에 개입한 사례가 있고, 경찰 내부 비리도 심심찮게 터지고 있어서다.
2007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이 한 예다. 당시 한화건설 고문이던 최기문 전 경찰청장은 현직 경찰서장 등에게 사건을 축소·은폐하도록 외압을 넣었다. 이 일로 최 전 청장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경찰이 겪는 외압의 증거는 곳곳에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유대운 의원은 지난 5월 술을 마신 채 경찰서 지구대를 찾아가 “지역구민의 딸을 괴롭힌 바바리맨을 찾으라”며 사실상 수사지휘를 하기도 했다. 캐디 성추행 혐의를 받던 새누리당 박희태 상임고문과 성폭행 사건에 휘말린 심학봉 의원도 각각 새벽과 심야에 조사를 진행해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경찰 내부에선 부정부패 척결의 아이콘처럼 통했던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지난 11일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는 등 비리도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헬기 정비계약을 맺은 업체에서 6000만원을 받은 경찰관이 검찰에 송치됐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베테랑’ 같은 영화가 현실이 되려면 정치권 등 외부 개입과 내부 비리를 차단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장치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영화는 영화일 뿐… 정의파 서도철 형사 현실엔 없다?
입력 2015-08-24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