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우리 땅 출입금지” 불통의 장벽 세우는 지구촌

입력 2015-09-01 02:37 수정 2015-09-01 19:23
경제난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정부가 실효성 없는 장벽 설치에 몰두하는 모습을 풍자한 만평.


최근 지구촌 곳곳에는 ‘장벽’이 들어서고 있다. ‘개방’과 ‘소통’이 21세기의 트렌드임을 감안할 때 ‘방어’와 ‘차단’을 목적으로 하는 장벽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다.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예비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의 유입을 막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만리장성과 같은 장벽을 멕시코 정부 예산으로 쌓겠다는 다소 ‘황당한’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고도 CNN 등 미국 주요 여론조사에서 잇달아 공화당 예비후보 가운데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유럽과 중동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누가, 왜 장벽을 짓고 있는가.

영토와 장벽의 심리학… 빼앗거나 지키거나

이스라엘군은 최근 팔레스타인 땅인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 지역 바티르 마을 근교에 분리장벽 건설을 재개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이스라엘 대법원은 지난 4월 장벽 건설 대신 다른 방안을 모색하도록 판결을 내렸지만 최근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주민 58명의 농토와 포도밭, 수도원 등을 가로지르는 구간에 분리장벽을 세우는 작업을 재개했다.

군은 이 지역에 약 7.6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고 그 위에 철조망을 얹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을 분리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스라엘 측은 팔레스타인 무장분자에 의한 테러를 막겠다는 명분이지만 현지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주민 소유의 농토와 수도원 등 땅까지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는 이스라엘의 ‘꼼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지역은 2000여년 전 로마시대에 조성된 계단식 밭과 수로 등이 남아 있어 유네스코는 지난 6월 장벽이 세워지면 오랜 역사를 지닌 관개시설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고 이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동시에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지난 5월 팔레스타인을 찾아 직접 분리장벽 앞에서 기도를 하며 이스라엘의 장벽 확장에 반대 입장을 내비쳤지만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안보상의 이유로 요르단강 서안지구 곳곳에 콘크리트 장벽과 철조망을 확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러시아에 크림 반도를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국경에 철제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다. 현지 일간 우크라스카야 프라브다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앞으로 3년간 1억8000만 달러(약 2149억원)를 투입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경 2500㎞ 가운데 약 2000㎞에 걸친 구간에 방어벽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대장벽(Great Wall of Ukraine)’으로 불리는 이 계획은 동부지역의 친러 반군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로 지난해 아르세니 야체뉵 전 총리가 제안해 시작됐다. 동부 지역에서 여전히 반군과 교전 위협 때문에 현재까지는 10% 수준만 진행된 상태다.

그러나 장벽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높다. 당장 러시아군이 이를 감시한다는 명분으로 국경 지대에 5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대기시키고 있어 오히려 국경지대 긴장감만 높아졌으며, 경제난에 예산 낭비라는 지적들도 나오고 있다.

“난민들이 밀려온다… 일단 막아!”

영국과 인접한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칼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탄생지다. 백년전쟁 중인 14세기 영국군에 칼레가 점령되자 현지 대부호와 귀족들이 ‘도시를 살리고자 목숨을 내놓겠다’며 처형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민도시’가 된 오늘날 칼레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볼 수 없다. 난민에 대한 불관용만 있을 뿐이다. 지난 7월 28∼29일 난민 2000여명이 유로터널 시작점인 칼레 터미널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 등과 충돌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터널 주변에 보안 울타리를 강화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이미 470만 파운드(약 88억원)를 들여 자국 유로터널 터미널 주변에 장벽을 쌓은 데 이어 700만 파운드(약 131억원)를 추가로 들여 유로터널 주변에 2㎞가량의 장벽을 새로 짓겠다고 밝혔다.

난민들이 영국행을 택하는 것은 프랑스가 성인에게만 정착 지원금을 주는 데 비해 영국은 미성년 난민 대기자에게도 주급 39∼52파운드(약 7만∼10만원)의 수당을 주는 등 지원이 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과 같이 ‘난민 인기국가’들도 경기 침체로 재정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난민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 때문에 난민의 무분별한 유입을 제어하려는 분위기다. 급기야 유럽연합(EU)은 국가별로 난민을 분담해 수용하는 ‘쿼터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헝가리 정부는 지난 6월 세르비아와 인접한 남부 국경 175㎞에 약 4m 높이의 방벽을 설치해 논란이 됐다.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넘어온 난민들은 터키나 불가리아 등에서 세르비아를 경유해 헝가리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지난 6월 말까지만 헝가리에 밀입국한 난민이 6만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난민 유입이 늘자 헝가리에서는 도로 등 곳곳에서 “헝가리인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등의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난민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불가리아와 그리스도 난민들이 넘어오는 터키 쪽 국경에 담장을 높이 쌓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불가리아 정부는 2013년부터 터키와 국경을 맞댄 레소보 지방에 길이 32㎞, 높이 3m의 철조망 담벼락을 설치해 왔으며, 그리스도 터키와의 국경 12㎞에 장벽을 설치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국경 통제로 육로 대신 바닷길을 통해 유럽행을 택하는 난민이 증가해 지중해상의 난민선 전복 사고가 늘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경제 사정으로 난민을 감당할 수 없으며, 난민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도 섞여 있을 수 있다며 장벽 설치를 강행했다.

그러나 이런 장벽이 비용만큼 난민 차단에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는 이미 장벽과 첨단 장비가 군데군데 설치됐지만 미국 내 불법 이민자 수는 1100만명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국경의 장벽을 넘었으나 텍사스주 사막에서 숨진 채 발견된 난민 추정 시신도 수백구가 나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장벽 설치를 강행하는 것은 결국 자국민들에게 정치적 수단으로 장벽을 활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칼립소 니콜라이디스 옥스퍼드대 교수는 “장벽은 국경 통제의 극단적인 표현”이라며 “물리적인 장벽은 이유야 어떻든 보호와 안전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며 정치인들로서는 ‘외부의 위협에 안전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수단”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말했다.

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