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론(John W. Heron·惠論·1856∼1890)은 1885년 6월에 내한한 개신교 개척 의료 선교사였다.
그는 1884년 4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첫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으나, 뉴욕에서 1년 간 의사 실습을 한 후 알렌과 언더우드에 이어 세 번째 장로회 선교사로 서울에 도착했다.
제중원 2대 원장, 고종의 시의, 성서번역자회 위원, 조선성교서회(기독교서회 전신) 창립 회장, 그리고 남편이자 두 딸의 아버지로 살다가 1890년 7월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그의 사망으로 양화진외국인묘지가 만들어졌다. 그가 5년간 서울에 남긴 삶의 흔적과 한국 선교를 위한 헌신을 살펴본다.
헤론의 생애는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먼저 그의 개인사에 두드러진 몇 가지 특징을 연표로 정리해본다(표 참조).
헤론은 누구인가
첫째, 헤론은 영국에서 태어나 14세이던 1870년 부모를 따라 미국 테네시로 이주한 이민 1.5세였다. 언더우드나 에비슨도 10대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1.5세였다. 익숙한 문화를 떠나서 낯선 타문화를 경험하고, 고향을 상대화하고 국제 감각을 지닌 것은 선교사로서 큰 자원이었다. 헤론은 영국에서 14년, 미국에서 15년, 한국에서 5년간 나그네로 살고 영원한 고향으로 갔다.
둘째, 헤론은 선교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개인의 입신출세를 희생한 헌신자였다. 1885년 1월말 암스하우스병원에서 부의사로서 의술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모교 테네시대학 의학부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그러나 헤론은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20대에 모교의 교수로 임명되는 명예로운 자리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뉴욕에서 YMCA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의대생들에게 선교의 중요성을 고취하고 한국행에 나섰다.
셋째, 헤론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한국에 임명한 첫 선교사였다.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를 대표하여 극동의 미지의 나라 조선에 파송되는 첫 선교사가 가져야 할 복음적 신앙, 건강, 의지와 용기, 전도열, 탁월한 의술, 판단력과 인격 등을 골고루 갖춘 자였다. 그것은 대학 시절 이후 그를 지켜본 여러 목사와 교수와 의사와 성도들의 추천서가 증명했다.
넷째, 그는 잘 준비된 선교사였다. 그는 임명 후에도 선교 현장에서 투입되면 바로 쓰임 받는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 뉴욕에서 1년간 의술을 실습한 후에 선교지로 왔다. 1884년 1월 일본에서 보낸 이수정의 미국선교사 요청 편지가 뉴욕 ‘크리스천 위클리(Christian Weekly)’에 발표되었다.
이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을 본 선교본부 실행위원이던 브루클린장로교회의 맥윌리엄스 장로가 3월에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를 위해 선교사 2명의 2년 봉급인 5000달러를 기부했다. 4월 28일 선교본부는 1883년 5월에 의료선교사 지원 의사를 밝힌 적이 있었던 헤론 의사를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했다. 다만 6월, 중국 상하이에서 적응에 실패한 알렌 의사가 뉴욕 선교부에 한국행을 요청했고, 7월 선교부의 허락을 받는 알렌이 9월 22일 서울에 도착하면서 첫 내한 주재선교사가 되었다. 헤론은 뉴욕에서 1년간 의사로서 더 훈련을 받고 1885년 6월 2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다섯째, 헤론은 의료·교육·전도·문서·여성 등 다섯 가지 분야가 함께 가야 한다고 본 ‘통합적 선교 신학’을 가졌다. 1887년 9월 알렌 후임으로 구리개 제중원 제2대 원장 겸 고종의 시의로 임명받고 1890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전파하고(전도와 문서) 가르치고(의학조수 교육과 고아원학교), 고치는(의료)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했다.
여섯째, 그는 이 땅에 뼈를 묻은 첫 선교사였다. 그는 1890년 7월 26일 내한한 지 5년 만에 선교사 중 처음으로 병사(病死)했다. 여름이라 빨리 시신을 매장해야 했으므로, 정부는 양화진에 외국인 묘지를 마련했다. 헤론은 부활을 기다리는 양화진 언덕에 묻힌 첫 외국인이 되었다. 그는 시신마저도 선교의 백 년 대계를 위해 사용된 자였다.
일곱째, 헤론은 잊혀진 선교사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정규 선교사의 개념은 ‘죽을 때까지 평생 전임으로 헌신한 선교사’를 의미했다. 그것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일생을 걸고 선교부와 계약을 하는 관계였다. 은퇴 전에는 죽음만이 그 관계를 무효화할 수 있었다.
다만 요절한 경우는 정규 명단에 넣지 않았다. 헤론은 5년 사역 후 사망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정규 선교사’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 결과 잊혀졌다. 그 아내는 헤론 사후에 게일 목사와 결혼하고 원산과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두 딸과 함께 스위스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1908년 서울에서 사망했다.
헤론 부부는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선물의 삶, 그것이 또한 헤론의 삶이었다.
옥성득 교수(美 UCLA)
미국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 석좌 부교수. 서울대(영문학·국사학), 장로회신학대학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보스턴대에서 기독교 역사 공부.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 근대사와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양화진에 묻힌 첫 선교사 헤론] (1) 첫 임명, 첫 순직 선교사 헤론
입력 2015-08-25 00:21 수정 2015-10-26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