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한국정치사상사 대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망국과 광복, 하나님의 계시는 지배계급 회개”

입력 2015-08-22 00:45
강민석 선임기자

아파트 현관 앞에 서자 서울 ‘영락교회’ 교우의 집 팻말이 반겼다.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역 앞 한 대단지 아파트. 한국정치사상사의 대가이자 학계의 군자 신복룡(73) 전 건국대 석좌교수 집이다.

그의 저서 ‘한국정치사상사’ ‘한국정치사’ 등 27권은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짚어낸 원전으로 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분단의 문제를 심도 있게 들여다본 ‘한국분단사연구 1943∼1953’은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오늘의 우리에게 통일을 향한 열쇠와 같은 학문적 업적이다. 그는 이 책과 ‘한국정치사상사’로 2001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크리스천조차 잘 모르는 신 교수의 업적이 있다. 예수 정신을 마음판에 새기고 행한 구한말 선교사들의 한국 관련 저서 번역이다.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 게일의 ‘전환기의 조선’, 맥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 알렌의 ‘조선견문기’,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등 23권이 평생 학업의 결과다. 19세기 말 한반도 북방 또는 남방선교 루트를 통한 복음 전래의 기록은 그의 손을 거쳐 한국 기독교 역사의 지형으로 파악됐던 것이다.

광복 70년의 대한민국.

유다 백성은 바벨론 포로의 속박에서 70년 만에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짓고자 했다. 복음 전래 130년. 우리는 여전히 역사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처럼 죄인 된 심정이다. 그 빚진 자의 마음을 노(老)학자에게 들어봤다.

-23권 번역은 방대한 작업이었습니다. 신학생들만이 아니라 후학들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바탕이 되다시피 하는데요. 어떻게 지난한 작업을 하시게 된 겁니까.

“젊은 날 국회도서관에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어요. 그때 헐버트(1863∼1949) 선교사의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를 발견했어요. ‘아,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정작 우리는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컸습니다. ‘주님, 한말 선교사들의 자료를 제가 주석할 수 있도록 힘을 주세요’라고 간구했어요.”

-선교사들이 입국했을 때는 망국의 시기였고, 서세동점의 때였습니다. 선교사 즉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에 대한 선교사들의 첫 인상은 불결, 나태, 무지, 미신이었습니다. 여리고 가는 길처럼 생각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생각을 바꿉니다. 알렌은 조선이 우상숭배의 나라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요.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쓴 지리학자 이자벨라 비숍은 한국인의 나태는 수탈로 인한 체념이었다고 말했어요. 그들에게 서구 우월주의와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분명히 있습니다만 그들을 통해 한국인들이 미망(迷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역사하셨다는 거죠. ‘천부의 인권’ ‘여성의 발견’ ‘몽매(미신)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망국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광복 70년이 됐어도 분단이라는 속박 속에 살아갑니다.

“망국과 광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지배계급의 회개가 아닐까요? 유감스럽게도 망국 무렵의 죄악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회개라는 말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한국사회 리더들이 깊이 새겨야 할 대목 같아서요.

“‘선비후개 선선후비(先非後改 先善後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먼저 실수했으나 후에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지만 먼저 훌륭했으나 나중에 죄 지은 사람에 대하여 준엄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같지 않을까요. 망국의 일차적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맹자의 말 가운데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스스로 멸망할 짓을 한 연후에 남의 나라가 와서 멸망시킨다’는 게 있어요. 문제는 먼저 실수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역사가 지속된다는 겁니다.

-학자로서 친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가 간음한 여인을 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뭘 끄적이십니다. 그분도 단죄에는 멈칫거리신거죠. 친일 논쟁은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일 뿐입니다. 망국의 원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이 많지 않다는 거죠. 서정주 시인의 ‘해방될 줄 몰랐다’는 말이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가룟 유다처럼 마지막까지 죄 짓지 말자는 겁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숭모도 선선후비의 사례일 수 있겠습니다. 그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므로 의미가 더 클 수 있고요.

“건국 공로가 분명히 있는 분이죠. 그 분을 추모, 숭모, 현창하는 분들이 가져야할 자세는 말년의 죄에 대해 고백해야 한다는 겁니다. 진솔한 고백과 사과가 있고 난 후 공을 얘기해야죠. 공로만 강조하다 보면 허물이 묻힙니다. 역사가 용서하지 않아요.”

-김구와 이승만을 평가해주십시오.

“김구는 가슴으로, 이승만은 머리로 살았어요. 열렬한 가슴의 투사는 머리로 근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어요.”

-해방 공간에서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있었을 까요.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도산 안창호(1878∼1938)였을 겁니다. 지혜를 갖춘 지도자였죠.”

-선생의 삶 속에서 영향을 받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까.

“20대 때 서울 청계천 헌책방 등지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종로6가 서울복음교회를 다녔어요. 장성환(1929∼2014) 목사와 지동식(신학자·1910∼1977) 목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장 목사님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라’고 하셨고 지 목사님은 ‘사람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을 수 없으니 젊은 날에 큰 그릇이 되도록 탁마하라’고 하셨어요. 일생에 좋은 분들을 만났으니 축복 받은 사람이죠.”

-한국 교회가 양적 성장에 치중하다 벽을 만난 상황입니다. 벽을 넘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지도자 최태용(1894∼1950) 목사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신앙은 복음적이어야 한다’ ‘신앙은 학문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조선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과 복음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교역자들에게 순교자적 믿음과 프란치스코의 사랑이 보이지 않습니다. 민족에 대한 고뇌도 잘 보이지 않아요.”

-52년 간 건국대에서 배우고 가르치셨습니다. 사표(師表) 삼으신 분이 있으십니까.

“사학과 박형표 교수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족주의 사관 2세대에 해당하는 선생님은 민족의 수난을 강의할 때 눈물을 줄줄 쏟으셨어요. 요즘 세상에 흐느끼면서 강의할 교수가 어디 있습니까. 대학원 때 김영두(고려대 정치학) 교수님도 계셨어요. 제가 석사학위 논문을 다 쓴 후 선생님의 서울 돈암동 산비탈 댁을 찾아갔어요. 엄동설한이었는데 홑겹 문풍지 방은 영하였고, 사과궤짝에 신문지를 발라 책상으로 쓰고 계셨어요. 난 그분에게서 청빈을 배웠습니다. 교수로 살면서 돈의 유혹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나마 허물없이 산 것이 그분 가르침 덕입니다.”

-해방둥이나 다름없고, 한국전쟁을 체험한 정치학자입니다. 광복 70주년이 남다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충북 괴산 시골 마을 태생입니다. 어린 시절 고드름으로 주린 배 채우고 구호품 씨레이션 먹으며 공부했던 세대죠. 한국전쟁 때 B29 전투기 폭격으로 위험에 처했을 때 아버지가 내 몸을 덮쳐 살려냈으니까요. 괴산경찰서 옆이 집이었는데 고문당하는 이들의 신음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1950년대 중후반까지 공비토벌이 이뤄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데올로기로 인해 이성이 마비된 시대를 살아낸 거죠.”

-사모님이 독립운동가 후손이죠.

“아내(최명화·73·전 영락교회 권사회장)는 독립운동을 했던 장인 최익환(1889∼1959)으로 인해 고초가 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장인은 10여년의 투옥 생활을 했습니다. 아내는 유년과 청소년기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겠죠. 아내의 외가는 평북 곽산의 한국교회 초기 신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던지 놀라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유신 시절 제가 크리스천아카데미 특강을 했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와중에 아내에게 전화했더니 걱정은커녕 ‘집안 걱정 말고 몸성히 다녀와요’하더군요. 하하. 아내를 만난 건 제 생애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청년 때는 선교사 저작물을 과업 삼으셨고, 은퇴 후인 지금은 뭘 과업으로 삼으셨습니까.

“선교사 저작물은 영어권에 대한 성과에 불과해요. 불어, 독어, 러시아 문서 등은 미답이죠. 후학에게 맡겨야죠. 앞으로 세 가지를 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플루타크영웅전’을 번역하는 일인데 이는 모두 마쳤어요. 둘째는 ‘삼국지’를 번역하는 일인데 80%를 이뤘습니다. 셋째는 야고보서 4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시간을 허락해주신다면 우리말 성서 윤문을 필생의 작업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훌륭한 학자들이 번역했겠지만 우리말과 거리가 먼 내용이 많습니다.”

신복룡

1942년 충북 괴산 출생. 건국대 정외과와 같은 대학원, 미국 조지타운대 등에서 공부했다.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쳤다. 건국대 중앙도서관장과 대학원장 역임. ‘전봉준 평전’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정치사상사’ 등 총 55권의 책을 쓰고 번역했다. 이 가운데 선교사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 등 선교사 관련 책이 23권이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